김경수 선생님의 염상섭 연구 중에서
한국 근대소설 연구자들 가운데 염상섭 소설에 대해 논한 사람은 많지만, 그 가운데 '염상섭 전공자'라고 했을 때
내가 감히 인정하는 연구자가 몇 분 계시다. 김윤식 선생님은 당연하고 그 다음 자리에 놓은 분에 김경수 선생을 꼽고 싶다.
김종균, 이보영 선생님 등도 계시지만 두 번째 자리는 김경수 선생님을 놓고 싶다.
이유는 한 가지, 작품 분석의 밀도며 다각적인 접근 방법 그 가운데 한국근대소설의 형성과 관련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
몇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발표한 연구 논문들이 있다. 발표될 때마다 챙겨본다고 했지만, 한 권의 책으로 엮인 후 다시 읽어본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차차 정리해보고 내 생각을 덧붙여 나가기로 하고, 오늘 읽은 글 가운에 생각나는 몇 대목을 정리해 놓는다.
김경수, <염상섭과 현대소설의 형성>(일조각, 2008)
염상섭이 "식민지시대 조선의 현실 속에서 주고받았던 다양한 영향관계와 상관관계'를 밝히고자 한 책.
그 영향 관계의 구체적인 양상을 초기 문학에 있어 번역 활동과 독서체험, 연극 등과 관련된 체험, 신문 스캔들 기사 등 다각적인 관점에서 다루었다. 이러한 연구 성과 가운데, 내가 주목하는 것은 '기자체험'과 관련된 내용이다. 이 키워드에 국한해서 본격적으로 다룬 논문은 없지만, 부분 부분 언급된 내용은 물론 그 작품창작의 기원이 되는 것과 그 경로를 설명함에 있어서 대전제에 해당한다고도 할 만한 사항은, 염상섭이 '신문기자-작가'였다는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돋보이는 논문은 당연, <진주는 주엇스나>론에서 주목한 '현대소설의 형성과 스캔들'의 관계를 다룬 글이다. 현대소설의과 스캔들 기사의 관련 양상을 시론적으로 문제제기하고 있는 논문은, 나의 박사 논문에 대한 한 길잡이 논문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내용은 다음에 정리하기로 하고, 오늘 발견한 이 구절 때문에 흥분한 이유를 써놓아야겠기에.
"덴지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뒤 염상섭은 새로 창간된 [동아일보]의 정치부 기자 발령을 받고 귀국하낟. 이렇게 시작된 염상섭의 기자 생활은 망국인으로서의 주체의식과 개인적인 입신에의 야심을 현실적으로 타협시킬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가 기자 생활을 하면서 발표한 <신석현 사건에 감하여-이출 노동자에 대한 응급책(동명, 1922.09.03~10)이라든가 <노동운동의 경향과 노동의 진의)(동아일보, 1920.04.20~26)같이 정치적인 색체가 두드러진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아일보]기자로서의 이러한 활동이 그에게 사회인으로서 일정한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을 개연성은 물론 존재한다. 그러나 그 생활은 오래가지 못한다.""(p.201, 염상섭 소설의 근대성)
법리학 연구에 대한 열망, 법학 내지는 정치학 공부를 하고 싶었다. 정치를 비롯한 사회 모든 분야에서 조선인의 진출이 차단된 식민지의 정치적 상황에서, "경제적 생활의 방편인 기자 생활과 더불어 '정신적 생활'의 방편으로 손을 된 문학의 길"로 나아간 것은 당연한 결과.
다음은 오늘의 하이라이트 대목.
"식민지시대에 염상섭이 열어놓았던 근대소설의 가능성이 그 이후 채만식이라든가 이기영 등 다른 작가들에게 인식되어 계승되었을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까지 그 형상은 분명하게 밝혀져 있다고 할 수 없는 실정이다."(p.231) 이 문장에 불인 주석57번.
"방민호의 [채만식과 조선적 근대문학의 구상](소명,2001) 같은 연구서가 이러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예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책에서 그는 세대론과 연관지어 염상섭과 채만식의 문학을 한데 논할 수 있을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는데, [삼대]에서 강력하게 설정된 세대의식을 감안하면 개연성이 전혀 없는 해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점에 대해서는 방민호의 책 4장 '채만식 문학에 나타나는 '세대' 모티프와 식민지 근대의 극복이라는 문제'를 참조하라."
위의 주석이 나에게 준 영감은 무엇인가?
염상섭과 채만식을 한 글에서 다룰 수 있는 이유의 한 가지를 시사받았다고 할까. 염상섭, 현진건, 채만식을 선정해 놓고 한데 묶을 수 있는 내적 연관과 그 이유를 찾고 있었다. 염상섭과 현진건이야 '신문기자-작가'라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별하겠는데, 채만식은 '잡지기자-작가', 양식적 고민과 풍자(풍자의 양식에 대한 고민) 정도의 특징을 가지고 앞의 두 작가와 어떻게 함께 다룰 수 있을 것인가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더 정확하게는, 어제까지 (태원 형을 만나기 전까지) 이 질문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방민호 선생의 글은 읽어봐야겠지만, 오늘 만난 이 대목은 염상섭과 채만식을 함깨 놓을 수 있는 가능성을 고민할 수 있게 한다.
************ 급하게 든 생각: 염상섭과 채만식 = 이어받기과 단절하기
정치부 기자, 정치에 대한 감각을 가진 염상섭이 문학을 통해 이룩한 세계와 대중잡지사에서 세태비평의 감각을 가졌던 채만식.
이 둘의 사이에는 작품 활동을 한 시기가 물리적 시간으로도 10년 내외의 시간차가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1920년대 후반의 세태(대중문화의 형성, 일상화) 변화라는 세대론적 단절이 놓여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1920년대 후반의 문화 아이콘은 '별건곤'이라는 잡지일 것이다. 영화(아리랑, 1926), 사의 찬미(레코드, 1926), 경성방송국 개국(1926) 그리고 별건곤으로 말해질 수 있는 1920년대 후반은 대중문화의 인프라가 구축되던 시기에 해당한다. 일본의 쇼와문화를 거의 직수입하게 되는 것도 중요한 사항이다. 이러한 도시 대중문화의 인프라가 구축되어 가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향유할 만한 능력을 갖지 못한 대중들의 모습. 이러한 배경 가운데 순수예술-문단은 대중(독자)획득이라는 문제에 맞딱뜨리게 된다. 신문과 잡지가 쏟아내는 '순문예-소설'보다 더 재미있는 독물들이 쓰여지고 읽혀지는 현실 속에서, 이들과 얼마간 경쟁해야 하는 상황도 있었을 것이고 그 속에서 문학다움에 대한 고민들이 있었을 터. 물론 한 편으로 순문예의 자폐성에 대한 자각과 읽히지 않은 문예에 대한 고민, 문맹독자는 물론 계몽해야할 대상으로서 독자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요구되던 시기였다. 당시 온 문단의 진단과 타개책의 초점은 작가들의 생활(원고료)과 대중획득에 대한 내용들로 점철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한국소설사는 표면적으로 프로문학의 정점에 해당하지만, 대중에 대한 고민과 매체 환경의 변화로 인한 소설쓰기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가능하게 된다. 그 이후 1930년대 만주사변과 신간회 해체를 기점으로 급변하게 되는 억압 통치의 표면화와 언론의 상업화 그리고 도시의 문화의 일상화 등으로 이어지는 변화 속에서 한국소설은 새로운 국면으로 흐르게 된다. 이러한 전사로서 1920년대 후반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 이전 시기와 이 시기를 관통한 작가가 염상섭이라면 이 시기의 처음에 놓이는 작가가 채만식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생물학적 의미의 세대론을 넘어서는 새로운 글쓰기의 상황 하에 놓인 작가의 출현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기자-작가'의 의미가 매체환경의 변화 속에서 그 역할과 소설쓰기의 내용이 달라지는 지점에 채만식이 놓이는 것이다. [별건곤]-[혜성]-[제일선]으로 이어지는 '잡지기자'의 글쓰기와 채만식의 초기 문학 세계는 이후 세태 비평과 조선적 풍자문학의 창출을 예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의 마크 트웨인!
아무튼 이러한 관점에서 염상섭과 채만식의 연결점과 차이점을 설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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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논문의 목적은 무엇인가?
'기자-작가'라는 키워드로 헌국소설의 어떤 새로운 부분을 설명해낼 수 있는가?
논문의 목표를 가시화시킬 때, 마지막 장 특히 논문의 귀결점에 놓이는 것은 무엇인가?
그 귀결점에 놓이는 대상, 즉 내가 논문을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을 담아낼 수 있는 작가나 작품은 무엇인가?
이제야 이런 질문들을 하고 있다니... 한심하기도 하고 조급해지기도 한다.
내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