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상담을 하면서: 글의 안부를 묻다
<글의 안부를 묻다-P君에게>
박정희(서울대 교수학습개발센터 글쓰기 교실 연구원)
“선생님, 오는 방학에는 이 글을 꼭 완성해보겠습니다.” 두 달여 동안 힘겹게 쓴 학기말 보고서를 담당 선생님께 제출한 날, 군은 ‘글쓰기 교실’에 찾아와 나에게 고맙다는 말과 함께 이 말을 남기고 떠났소. 그간 P군의 안부와 더불어, 완성하겠다던 그 글의 안부도 궁금해서 몇 자 적소.
채 한 학기도 안 되는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군과 처음 만나던 그날이 꽤 오래 전의 일 같소.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날, 군의 모습이 떠오르는구려. 군도 알다시피 ‘글쓰기 교실’ 상담 프로그램은 여러 가지가 있소. 예약 상담, 이메일 상담, 당일 방문 상담, 학기 별로 진행되는 ‘리포트 튜터링’ 프로그램 등. 군이 신청한 것은 ‘리포트 튜터링’ 프로그램이었소. 다른 상담과 달리 이 프로그램은 한 학기 동안 보고서 작성의 전(全)과정을 상담 선생님과 함께 진행하는 것이오. 신청을 하고 선발이 되어야 하는데, 이 프로그램에 군이 선발이 되었던 것이오. 상담실을 방문한 첫날, 군은 나에게 세 번의 지원 끝에 드디어 선발되어서 기쁘다는 말을 했소. 그 말과 함께 이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글쓰기에서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자 하는 바도 비교적 정확하게 요구했소. 상담실을 찾는 학생들의 경우, 대개는 침묵하거나 자기 방어를 하거나 선생님의 말에 일방적으로 기대는 경우가 많은데, 군은 의욕이 넘쳤소. 군을 만난 첫날의 그 의욕적이었던 한 마디 한 마디가 생각나는구려.
군을 만나기 전에, 나는 기대보다는 부담감이 더 컸던 것 같소. 지원서의 내용을 봤을 때, 공학 전공수업의 기말보고서라는 점이 그랬소. 내가 전혀 모르는 분야의 전문적인 글쓰기를 지도할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이 있었다오. 내 이런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군을 만나는 내내 분발했다고 하면 군은 어떤 표정을 지을 지 궁금하오.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 군과 나는 두 달 남짓 동안 대여섯 번 정도 만났구려. 생각해보면 군이 가장 힘들어했던 것은 글의 주제를 잡기 위해 보낸 시간들이었던 것 같소. 처음 두세 번의 만남 때까지, 군이 애써 고민해온 주제를 나는 너무도 냉정하게 돌려세우지 않았겠소. 하지만 군은 그때마다 포기하지 않고 다음까지 해결해오겠다며 상담실 문을 나갔소. 지금에 와서야 하는 말이지만, 내가 그때 짓궂을 만큼 주제에 대해 질문을 한 것은 그 또한 글을 쓰는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훈련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소.
상담실을 찾는 대개의 학생들은 주제 잡기가 제일 힘들다고들 하오. 그건 당연한 일. 그리고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을 많이 듣소. 좋은 주제의 조건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마는, 한 가지만 말하리다. 대부분의 글쓰기가 그렇지만, 특히 수업 과제물의 경우 그 독자는 그 과제를 부여한 선생님일 터. 결국 글을 쓰는 목적은 독자의 마음에 들기 위한 것 아니겠소. 그런데 대개의 학생들은 이 사실을 잊고 막무가내로 자기에게만 중요하고 자기가 잘 아는 이야기만 하려고 하오. 물론 이러한 태도가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겠소마는, 주제를 잡는 과정에 과제를 부여한 선생님의 의도와 여타 조건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글이 어찌 독자(선생님)를 감동시킬 수야 있겠소. 글의 종류와 형식, 분량과 기한(deadline), 그리고 참고문헌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주제를 잡을 때 고려해야 하는 사항이오. 예컨대 분량의 경우, 같은 과제라도 분량을 A4 한 장으로 작성하라고 했을 때와 A4 5장 혹은 10장으로 작성하라고 했을 때, 이 조건은 단순히 분량만 맞추라는 말이 아니라 이 과제(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이 정도의 분량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보아야할 사항이오. 다시 말해 같은 내용이라도 그 형식과 분량에 따라 논의의 수준이 달라져야 한다는 뜻이오. 또, 이런 경우도 있잖소. 예컨대 참고문헌을 3개 이상 달라는 조건이 있는 과제. 이 경우도 자신이 참고한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어떤 자료를 참고할 것이냐를 선정하는 것부터가 주제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소. 그때도 말했지만, 참고문헌의 수준을 가늠하는 일이 학문의 중요한 과정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는 점만 덧붙여 두겠소. 이런 조건들에 대한 고민이 결국 주제를 잡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소.
그 과정이 힘겨웠던 만큼, 군은 독자를 만족시키면서도 자신의 깜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주제를 설정하지 않았겠소. 군은 주제를 전개시킬 글의 개요를 작성한 뒤 나에게 보여주고는, 초고를 완성해서 다시 찾겠다는 말을 남기고, 또 멋지게 사라졌소. 하지만 어디 글쓰기가 계획한대로 잘 진행될 리 있겠소. 우리 학생들은 정말 바쁜데, 선생님들은 꼭 그 과목 하나만 수강하는 학생인양 대하시잖소. 군 역시 다른 바쁜 일로 시간적 여유도 없고, 시간을 내서 써보지만 마음만큼 잘 써지지 않는다는 하소연과 푸념의 메일을 나에게 보내오지 않았소. 그때 조금 독촉을 할 걸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하루를 거의 10분 단위로 나누어 사는 군이 안쓰럽기까지 해서 더 독촉할 수는 없었다오. 그러다 한 동안 뜸했고 그렇게 몇 주일이 지났고, 어느 날 다따가 군에게서 초고를 쓴 파일과 메일을 받았소. 반가움은 잠시, 군을 만나기로 한 그날까지의 며칠 동안을 나는 잊을 수가 없구려. 감히 말하건대 군의 글을 제대로 읽기 위해, 내가 읽은 글들이 아마 군이 읽고 참고한 자료보다 더 많았을 것이오.
다른 사람들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글을 남에게 보이는 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점을, 나는 잘 알고 있소. 어느 소설가가 쓴 ‘글을 쓰는 일은 알몸으로 타인 앞에 서는 것’이라는 문장 앞에서 오래 서성거렸던 기억도 있소. 군의 마음이야 어찌 되었건 나는 글쓴이의 그 마음과 용기에 답하기 위해서, 보내준 글을 최선을 다해 톺아가며 읽었소. 글쓰기 상담에서 내담자를 위해 ‘빨간 펜’을 사용하지 말라는 말도 하지만, 나는 군이 쓴 한 단어, 한 문장도 그냥 읽을 수가 없었소. 그렇다고 군의 글이 그 ‘빨간 펜’만큼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니 오해는 마시길. 그보다는 독자로서 이만큼 꼼꼼하게 읽었다는 나의 마음을 군에게 ‘빨갛게’ 보이고 싶어서였음이 맞을 듯.
군이 쓴 글에 내가 ‘빨간 펜’을 든 사항은 글의 통일성이나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경우뿐만 아니라 문장과 문장 사이의 비약, 맞춤법, 문장 부호 하나에까지 걸쳐있지 않았겠소. 그런데 자네뿐만 아니라 상담실을 찾는 대개의 학생들의 경우, ‘이 문장은 무슨 의미로 쓴 것이냐’라고 질문하면 대개는 난처해하며 이런 저런 설명을 그제서야 하곤 하오. 그 문장, 그 표현만으로는 그 의미를 다 전하지 못한 탓에 독자는 이해를 다 못하거나 오해를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소. 군도 잘 알다시피 글쓰기는 눈앞에 없는 독자에게 문자라는 수단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 해서, 글을 쓰는 사람은 자기 앞에 없는 독자를 마주하고 전전긍긍할 필요가 있소. 한 문장을 쓰고 난 뒤 독자가 이해했을까를 묻고, 더 잘 이해시키기 위해 다른 방법은 없을지 고민한 뒤 다음 문장을 쓰고, 그렇게 한 땀 한 땀 문장을 이어나가야 하오. 자기가 아는 것을 독자도 다 알아줄 거라고 믿는 것은 큰 오산이오. 내가 군의 글에 ‘빨간 펜’으로 문장과 문장 혹은 단락과 단락의 비약을 지적했을 때도, 군에게 한 말은 독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친절하게 쓰라는 것이었소.
그리고 초고를 수정한 글도 그랬고 퇴고를 한 글에서도, 문장성분 간의 호응이 되지 않는 잘못된 문장과 함께 맞춤법을 틀린 것이 간혹 보였소. 군은 그럴 리 없겠지만, 대개의 학생들은 자신의 글에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잘못된 곳에 ‘빨간 펜’이 가해져도 그리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소. 학생들은 영어 단어의 철자를 틀리거나 관사를 잘못 붙이면 얼굴 붉히며 부끄러워하면서도, 우리글 맞춤법을 틀리면 그럴 수도 있다는 듯이 슬쩍 넘어가는 마음이 있는 것 같소. 모국어이니만큼 어쩌면 더 부끄러워해야 일인데 말이오. 어이없게도 오타가 있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오. 이 때문에 독자가 글의 내용에 관계없이 글쓴이의 성실함을 의심할 수도 있고, 글을 더 읽고 싶은 생각을 가로막을 수조차 있으니, 자신이 쓴 문장을 꼼꼼하게 살피는 것은 중요한 일. 사소한 것에 소홀해 낭패를 볼 수 있다는 것이오.
P군. 군의 안부가 궁금하여 시작한 편지가, 군을 내세워, 글쓰기 교실을 방문하는 학생들 혹은 보고서 작성에 임하는 학생들에게 전하는 내용이 되어버렸소. 조금 무안하긴 하지만, 내가 꼭 하고 싶었던 말을 덕분에 이 기회를 빌어서 정리할 수가 있었소. 그리고 이 말은 꼭 해두고 싶소. 군에게는 어떤 의미로 기억될 지 가늠조차 힘들지만, 군을 만나 함께 나눈 시간이 나에게는 아주 소중한 사연으로 채워졌다오. 군이 쓴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으며 문장 뒤에 혹은 행간에 숨겨진 군의 마음을 읽으려 했소. 그리고 내가 쓴다면 어떻게 쓸까하는 입장에서 읽었소. 그렇게 군에 대해 알아가려던 그 순간의 순수한 내 마음들이 결국은 내 공부의 목적이었음을 알지 않았겠소. 그 동안 지식 쌓기가 공부인 양하며 지내던 나에게 군과의 만남은, 글로써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내 공부의 목적임을 새삼 확인시켜 주었소. 군에게 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군과 함께 했던 시간은 나의 공부와 글쓰기에도 많은 질문과 고민을 던져주었소. 고맙소.
이 편지를 받아본 군의 표정을 그려보게 되오. 이런 협박이 어디 있나, 하는 표정. 군의 안부가 궁금한 만큼 군의 글도 궁금하다오. 혹 이 방학이 다 가기 전에 군의 안부와 함께 그 글의 안부도 전해 볼 수 있을지 기다려보겠소. 아무쪼록 좋은 글 많이 읽고 누구에게든 소개해보면서, 그렇게 건강하게 이 방학 잘 지내시길 바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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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에게 글쓰기 강의를 한지도 벌써 몇 년째.
그러다가 작년 가을, 서울대학교 글쓰기 교실에 들어간 것은 내 인생에 중요한 '사건'이었다.
글쓰기를 가르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너는 잘 쓰느냐'라는 물음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갈 때,
글쓰기 상담 활동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학생들과의 만남이 결국 나 자신에 대한 상담이 되었던 것이다.
그 기억을 짧게 쓴 글이다.
지난 금요일에 '제15회 우수리포트 시상식'이 있었다.
시상식 사회를 보면서 꼭 하고 싶었던 말을 못했다.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고 할까?
그 지난 주에 같은 건물에서 전국 대학생 프레젠테이션 발표 결선 대회가 있었다.
이 대회를 참관했던 기억 때문일까, 그것과 함께 '우수리포트 수상집'을 겹쳐놓으니 마음 한 켠이 우울해졌다.
장관상, 총장상을 걸고 치뤄진 대회.
결선에 오른 9팀의 학생들의 프레젠테이션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봤다.
주최하고 후원하고 자본의 힘일까, 대회는 성대했다. 방송을 위한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다.
설명이 더 자세할 필요도 없다. 그저 '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쇼'의 능력이 우리 사회(기업)가 요구하는 능력 가운데 아주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우울하다. 그 '쇼'를 받치고 있는, 그 '쇼'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인 '이야기'에 대한 고민은 결국 '글쓰기' 능력일 것인데
'우수리포트'는 그것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 없는 행사였다.
물론 그날의 프레젠테이션 수준은 최고였다. 그리고 그 내용과 발표도 훌륭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만큼, 아니 그보다 중요한 '글쓰기'의 중요함이 푸대접 받는 상황에 대한 씁쓸함이다.
이 말을 시상식을 마치면서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다.
장관상, 총장상이 아니어도 카메라가 중계하는 행사는 아니어도 좋다,
상금이라도 올려달라고 한 마디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았다. 들어줄 사람이 없었으므로.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