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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복 선생의 <1930년대 혼종 텍스트와 화문 양식> 리뷰

딜쿠샤 2012. 4. 14. 19:28

리뷰: 조영복, 「1930년대 혼종 텍스트와 화문 양식」, ?어문연구?153, 2012.03. : 리뷰

 

조영복 선생의 이 글은 이른바 ‘저널리즘 문예물’의 양식적 특성에 대한 일련의 작업 속에 속하는 논문이다. 이 글은 문자텍스트와 그림텍스트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혼종 텍스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화문 텍스트는 뉴미디어인 영화와 활판인쇄술을 바탕으로 한 저널리즘 문예의 양식적 특성과 입체적이고 모자이크적인 미학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는 대상으로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간에 특정 시 작품의 경우 텍스트의 왜곡이 이루어진 바 있어 벌어진 해석상의 논란이 되는 작품이 있는 바, 이는 문자텍스트 중심의 문학사적 이해나 텍스트 해석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이들 작품의 경우 시와 화가 결합한 화문텍스트로 이해할 때, 그리고 획정되어 있던 문자텍스트로서의 독자수용의 입장을 벗어날 때 화문텍스트로서의 해석과 수용에 의해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조영복 선생의 이러한 작업은 근대 문학 장르와 양식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조영복 선생은 ‘저널리즘의 제도가 새로운 에크리튀르를 창안’해냈다는 관점에서 1930년대 문학에 대한 논의를 진행해오고 있다. 문학이 영화나 신문과 같은 매체와 영향을 주고받는 상황 속에서, 이제 문자텍스트는 새로운 ‘근대 저널적인 장르’들을 산출하고 있다. ‘저널적인 문예 장르’라는 말은 아직 없다.  여기서 내가 쓰는 말이다.  ‘저널적인 문예 장르’라는 말은 더 구체화시키고 다듬을 필요가 있겠지만, 이런 문제의식에서 쓰는 말이다. 즉 신문과 잡지로 대표되는 근대 저널리즘의 자장 안에서 근대 문학이 존재한다. 거친 비유를 해보자면, 근대 학문의 연구방법이 그랬듯이 문학연구 또한 문학이라는 대상이 획정되어 있는 무엇으로 여겼다. 예컨대 한 편의 장편소설은 거의 대부분 신문 어느 면에 연재의 형식으로 발표가 된 것이다. 그것은 신문지 위에 배치되어 있는 수많은 글들과 그림, 사진 중에 하나로서 존재한다. 신문지 위의 장편소설 한 회분은 그 자체로 독립되어 있기도 하지만 다른 텍스트들과 ‘파라텍스트’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신문과 잡지의 텍스트는 ‘모자이크성’을 띠고 있으면서 그 자체로 ‘성좌적 총체성’(벤야민)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간의 문학연구는 신문지 한 면에 다른 텍스트들과의 배치 역학이나 관계들을 배제한 채 소설 한 회 분만 따로 오려서 떼어내어 연구한 것과 다르지 않다. 1990년대 이후 이른바 문화론적 연구나 풍속사(미시사)적 연구 방법론들은 텍스트중심주의의 경계를 허물면서 근대성에 대한 고고학적 탐사의 괄목할만한 연구들을 견인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너무나도 쉽게 텍스트 자체의 경계를 허물어버린 감이 없지 않다. 그것이 텍스트의 안과 밖의 경계를 의식하지 않는 채 그저 넘나드는 방식 혹은 허무는 방식이었다면, 이제 텍스트 안이 밖을 의식하면서 어떠한 변화와 과정을 겪는지 그래서 그 안의 경계가 확장되거나 축소되는 양상 그리고 새로운 경계가 설정되거나 변형이 일어나는 지점들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하겠다. 예컨대 신문의 한 지면에 배치되는 기사로서 문학양식은 한정된 분량이라는 새로운 조건이 작용한 결과일 수 있을 것이다. ‘유머소설’이나 ‘콩트’ 같은 장르가 대표적이다. 이 양식들은 신문과 잡지가 탄생시킨 근대 저널적 문예양식의 대표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조영복 선생의 지속적인 작업인 연구 주제 역시 근대 ‘저널리즘적 문예 양식’에 대한 탐구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영복 선생이 이러한 연구 관점에서 ‘시문학’ 중심의 영역을 새롭게 접근하고 있다면, 같은 맥락에서 ‘소설’ 영역에 대한 접근을 시도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해보고 싶은 것이 이것이다. 조영복 선생은 1930년대에 주목을 하고 있다. 이 시기 신문 학예면의 중요성과 함께 모더니즘 문학 그 가운데 시문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소설문학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는 1920년대 후반에 주목하려고 한다. 아직 더 예각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하지만, 1920년대 후반은 1930년대 저널리즘의 상업화·기업화의 진행방향을 예견할 수 있다는 점과 아울러 소설문학사에서 볼 때 새로운 저널리즘적 시도가 모색되고 있었다. 예컨대, 영화소설의 창작, 합동연재소설 창작, 꽁트와 유어 소설의 창작 등.

조영복 선생의 이번 글을 읽고 내 연구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 내용을 하나 기록하여 둔다.

1. 신문의 모자이크성에 대한 논의: 신문은 ‘3면 기사적’ 성격이 강하다. 즉 사회 전반의 공공적 관심사나 대중적 흥미와 관련된 문제들이 신문의 중요한 기사거리라는 점에서 신문은 ‘집단’의 이해를 기반으로 한다. 신문의 개방성과 ‘집단’적 이미지는 신문의 모자이크적 속성에서 비롯된다.(263면) “지면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면서 시각적 효과를 높이는 ‘편집의 역할’은 모자이크적인 ‘배치’의 기술이다.” “신문은 지면의 제약을 ‘편집’으로 극복한다. 분량이 많은 비평이나 논문 성격의 글이 며칠 혹은 몇 주 단위에 걸쳐 연재물의 형태로 게재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글의 중간 중간에 작은 제목이나 번호가 붙어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것은 신문 지면 구성의 원칙이 ‘모자이크적 속성’을 반영한 것이다. 이는 일종의 편집 기술상의 원칙이기도 하지만, 신문 자체의 속성과도 분리하기 어렵다. 신문은 하루에 일어난 최신 사건들을 모아 둔 매체며, 유효 기간 또한 하루뿐인 일일 매체다. 신문을 읽는다는 것은 하루 사건들의 시·공간을 여행하는 것이며, 이 체험은 ‘하루’라는 사건이나 체험 단위로 편성된다. 따라서 장면구성이나 전환에 적합하다. 작은 예술로서의 바리에테, 카바레, 무성 영화 등은 신문과 함께 스피드와 짧은 호흡으로 특징되는 대도시의 양식이다. 일일 단위로 게재되는 연재소설이나 시리즈물, 공간 이동이나 장면 전환이 용이한 여행기, 르포성 기사, 명승지나 기념물 소개를 겸한 계절 수필, 단문형 에피그람 산문 등이 신문지면에 적합하다. 이 같은 새로운 읽기 쓰기는 새로운 ‘에크리튀르’이다. 행동, 사유, 사색, 의식, 무의식, 경험 등은 문자 언어를 통해 읽어내는 문예학적 방법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문자적 행위이다. 이 는 문예학적 모델이 아니라 소통적 모델에 가깝다. 삽화는 질감, 청각, 촉각 등의 감각의 물질적 소통을 바탕으로 한다. 예술이 ‘감각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는 질료 속에서 그 힘을 구체화 하는 것이라면, 삽화를 통해 물질성을 구현하는 이 같은 혼종 장르는 그 어떤 매체보다도 대중적인 힘과 잠재성을 구현할 가능성이 크다. 인간의 사고를 전문화, 세분화, 분석하는 황자의 힘은 감각과 감정의 분화를 가져왔지만, 문자 텍스트와 병행된 삽화의 존재는 사고와 감정의 분리를 재통합하게 된다. 그만큼 독자의 반응 역시 적극적이고 유동적이다. 이는 사유와 비판 중심의 책읽기 문화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264면)

2. 저널리즘의 대중성과 문학의 대중성: “혼종 양식의 관점에서 ‘대중성’ 및 ‘통속성’은 새롭게 평가될 수 있다. 통속성과 대중성은 텍스트의 개방성에 대한 오해가 낳은 것이기도 하다. 연재소설이 ‘대중성’을 갖는다는 것은, 복잡한 정보전달 처리 과정을 줄임으로써 일반 대중들이 소설 텍스트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때문이다. 신문소설이 대중성을 추구한 것이기보다는 연재소설의 재현 방식 자체가 대중성을 견인하고 있다. 즉 시각적 활자 매체로서의 기능과 문예의 소통 방식의 변화가 맞물린 결과이다. 신문연재소설의 대중성을 비판하는 담론이나 화문의 ‘화’로부터 그림을 배제한 언어 문자 중심의 ‘읽기’는 음성 언어 중심의 문자 문화가 갖는 획일성과 냉담성을 표상하는 것이며, 문학 담론의 엘리트주의를 반영한 것이다. 신문 연재소설의 문예학적 가치와 대중성, 통속성 문제는 1930년대 매체 변화와 매체들의 혼성적 관계망 속에서 논의되어야 한다.”(265면)

3. 이밖에도 저널리즘 양식과 문예장르의 문제, 물질적 감각과 독자의 수용 문제, 이를 바탕으로 한 텍스트의 해석 문제 등에 대한 논의는 많은 시사점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