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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전후의 채만식 내면 풍경

딜쿠샤 2012. 4. 27. 16:19

채만식은 1931년 1월에 '浩然堂人'이란 필명으로 [별건곤]에 '잡지기자참회'라는 글을 썼다. 잡지사에서 <속임업는 告白, 나의 懺悔>라는 기획을 하고 新聞記者, 醫師, 雜誌人, 麻雀狂 등의 필자들로부터 원고를 받아 엮은 코너의 글이다. 이 글에서 채만식은 '개벽사'에 입사헤 잡지 [별건곤]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글을 쓴다. 잡지사기자로 글을 쓰는 동시에 문인으로서의 창작에도 여념이 없는 생활을 할 때에다. 채만식은 청탁에 의한 글쓰기이지만, 잡지사기자로서 '참회'라는 주문에 답하면서 기자-문인으로서의 자기인식의 모습을 이 글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잡지기자의 참회라 하는 것보담도 티 아니한 환경에 誤植된 한 젊은 콤XXXX의 과거청산의 고민이라 함이 하겟다."라고 쓰고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당치 않은 환경에 오식된 한 젊은 코뮤니스트의 과거청산의 고민'이 담겨 있다. 무릇 기자란 취재를 위해 여학생교 여학생들 앞에서 선 어릿광대라는 표현과 이렇게 자기자신을 어릿광대라고 인식하면서도, 웃고 있는 광대의 눈물에 공감하고 있다.

 이어서 채만식은 자신을 "창백한 인테리의 지적 매음"과 다르지 않은 계급이라고 자위하고 있다. 자신의 계급적 한계, 즉 根據薄弱한 민족적 적개심과 야욕적 자유주의에 침체된 몰락한 중산계급의 막동아들로서 무기력한 인텔리의 업을 하루빨리 청산하기를 각오하고 있다.

 채만식은 신문사를 퇴사하고 3년 동안 고향 아버지 댁에 머물면서, 크로프트긴과 맑스를 탐독하고 농촌경제 현실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후 잡지사에 들어와 쓰고 싶은 글이 아니라 쓰기 싫거나 쓰지 못할 글을 쓰고 있는 저널리스트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반성과 전환의 계기를 모색하고 있다. 저널리스트로서의 삷은 인텔리로서의 무기력함을 배로 느끼는 삶이다. 이 시기 문인으로서의 창작은 희곡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는 <마땅히 써야 할 글>이 있다고 한다. 그 글은 어떤 내용일까? 저널리스트로서의 글쓰기에서 얼핏얼핏 보이는 세태비평 속에서 그리고 희곡이나 소품과 같은 문학 작품들 속에서 그 내용을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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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당히 해야할 일을 제체노코 하기 실흔 일이나 하지 못할<96> 일을 하게 되는 것이 誤植된 인생의 비애요. 맛당히 써야할 글을 제체두고 쓰기 실흔 글이나 쓰지 못할 글을 쓰게 되는 것이 軌道에서 밋그러진 짜나리스트의 고통이다.

사람이 세상에 생겨나 지닌 바 抱負을 직히지 못할지면 그 생명에 무슨 광채가 잇스랴.

마음에 업는 를 부르지지며 뜻에 업는 을 함이 엇지 마음에 업슨 노래를 부르며 뜻에 업는 우슴을 웃는 娼婦와 달음이 잇스랴.

蒼白한 인테리의 智的 賣淫이여! 나는 내 자신을 이러커 咀呪한다.

차라리 쇠사슬 이외에는 더 이즐 것이 업는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그러치 아니하면 타고난 宿命自足하는 뿌르의 忠犬....자유주의의 使徒로서 일생을 맛티든지 할 것이지 누구에게 强制한 배도 업고 또 그래야 할 필요도 업서스면서 왜 방향을 밧구게 되엿든가!

그러나 주사위는 이미 던젓다.

은 결정이 되엿다.

남은 것은 시간이다.

나는 맹세한다-목숨으로써 現在와 양립티 아니하기를 맹세를 한다.

무기력한 인테리 業을 하로 밥비 청산하고 나서 황금의 찬란한 배경 압헤 劒光이 시퍼런 XX-그것에 부드처 버혀지고 버혀지고 수업시 버혀져 새빨간 피가 淋漓하야 그러하야 그 날카라운 劍光이 무듸여지고 필경은 불어지고 하야 殺戮의 밤이 새이는 고요한 아츰 날이 도다 오를지...

세상을 아는 듯한 사람도 손을 꼿고 서서 必然만 기다린다.

그러나 필연은 필연으로만 나아나지를 못한다.

나로토니-들을 본바든 이 업시는 아모 것도 오지 아니한다. 그들의 만은 우리에게 큰 敎訓이다.

신문기자로 二年.....

그동안의 생활은 때아닌 떼카단이씀에 술과 게집에 파뭇티어 아모런 자각과 성찰이 업섯스니 말할 것도 업다.

根據薄弱한 민족적 적개심과 야욕적 자유주의에 침체된 몰락한 중산계급의 막동아들如意티 못한 세상에서 그와가 된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엇슬 것이다.

남의 일을 보아준다고 하면서 밤이면 술과 게집으로 살고 나제면 쪽속쪽속 솔고 잇스니-그러나마 頭領축의 비위나 맛추려고 하지도 못하고 팽팽한 성질이니 쫏기어 날 것은 뭇지 아니하여도 알을 일이다.

신문사를 쪽기어나서 달니 求職을 하려 하엿스나 개꼬리만한 常識의 소유자가 어데 가서 무엇을 하랴.

할 수 업시 고향으로 굴너 내려가서 3년 동안 어려운 아버지의 밥을 어더 먹엇다. <97>

나에게는 이 3년 동안이 一生의 운명을 결정하는 가장 크고도 결정적인 시기이엇섯다.

무엇보담도 나는 그동안에 만흔 독서를 하엿다.

처음에는 크로포도킨을 탐독하다가 맑스로 옴겻다. 이 동안이 아직 半生을 두고 양이나 질에 잇서서 가장 만흔 독서를 한 시절이다.

또 한가지 사회의....그 중에도 농촌의 객관적 정세를 보앗고 보는 법을 알엇다.

다시 서울노 뛰여 올나와서 잡지사의 밥을 먹게 되엿다. 처음은 亦是 그런 줄 저런 줄 모르고 지내다가 필경 나의 이데올로기-와 나의 행동과를 비교하여 보앗다. 그리하야 고민이 시작되엿다.

나의 지금 하는 일은 를 비교하면 후자가 전자보담 훨신 크다.

더구나 그 이라는 것이 나의 이데올로기-보담은 딴 세상인 「자유주의의 조선」을 위한 것에 지나지 못한다.

나는 현재의 생활권 속에 잇는 것이 결코 勞資關係로 가 아니다. 名實相伴合意制 속에 잇는 것이다.

그럼으로 푸로례타리아가 XX공장에 가서 앞흐로 自己네에 XX을 XX을 XX을 만드는 의미와도 달은 것이다. 그것은 크게 달으다. 나로써 내 自身을 단연코 용서하지 못할 일이다.

萬一 純 勞資關係라 하면 현재 내가 엇더한 사회적 노동(廣義)을 하고 잇다고 하더래도 양심에 붓그러움이 업슬 것이다.

나는 왜 이것을 버서나지 못하는가?

생각하면 아직도 나는 세련이 부족하고 약하다. 우리는 모든 올가니세-순을 통하여서만이 그 本使命과 힘을 나타내이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올가니세-以外에 서서잇다.

안 될 말이다.

나는 現在 조고마한 인간적 에 먹매엿잇다. 인간으로써 인간적 가 필요하기 때문이겟지만-그럼으로 해서 그것을 버서나지 못하고 헤매이는데 눈물이 잇다.

實際 XX의 세련은 全然 업것니와 理論의 修養도 매우 얏다. 이것을 더 깁히 한 뒤에 떨티고 나서려는데 나의 지금의 원인도 업는 것은 아니다.

또 한가지 큰힘으로 나를 붓잡는 것은 나의 30年間 껴러온 그 공기 그 감정에 꼭마즌 푸틔뿌르사회의 囹圍氣.

환경에서 버서나자면 그 싸히고 싸힌 第二天性을 깨끗이 써서 바리는데서만 어들 수 잇는 것이다.

알면서 티 아니하는 것은 모르고 티 아니함보다 더욱 이다. <98>

그러나 노력은 끈치지 아니하고 하고 잇스니 용서하여라.

새해라고 한다 半生을 다 살엇스니 남어지는 半生이다. 뜬 세상의 도 맛보아 보지 못함이 아니니 인제는 모든 인연의 줄을 끈코 所信에 향하야 邁進할 때다.

지금 생명이 업서진다하여도 과히 애석할 것도 업거니와 별로 미련될 일도 업다.

어느때나 한번은 죽고 말을 인생이니 차라리 가늘고 길게 삶음보담 짧어도 굵게 사는게 얼마나 한 일이냐.

잡지기자의 참회라는 제목에 끝니어 무슨 큰 惡德질이나 하엿나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읽은 사람은 실망을 하엿슬 것이다.

그와 가티 名實相半치 못한 것은 잡지 그것으로써 퍽 미안한 일일 것이나 실사 나는 잡지기자로의 참회는 업다. 使命만은 12까지는 아니라도 7,8은 다햇다고 생각하니까.

달니 나와 가튼 처지와 상태에 잇는 동지가 한사람이라도 잇서 이것을 본다 하면 반듯이 동일한 자아를 발견하고 늣김이 잇슬줄 밋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