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제 <협죽도 그늘 아래서> 리뷰
"이 소설(<협죽도 그늘 아래>의 첫 문장 "한 여자가 앉아 있다. 가시리로 가는 길목, 협죽도 그늘 아래"는 대충 헤어보아도, 이 작품 내에서 열 번 반복된다. 이와 유사한 문장까지 합친다면 거의 열다섯 번 반복된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한 여자가 앉아 있는 풍경을 중심으로 하되, 10~15개의 의미 단락이 이에 종속되어 배열되어 있는 셈인데,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의미 단락의 순서를 바꾸어도 소설의 이해에 거의 지장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독자들은 브라우저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하나의 의미 단락에서 쉽게 빠져나와 전혀 다른 의미 단락으로 돌입할 수도 있다. 마우스 버튼 하나로 새로운 상황에 접속할 수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성석제의 소설에는 다양한 의미 단락들이, 마치 연하고 맛있는 풀잎이 소나 사슴을 기다리듯 오밀조밀하게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별다른 제약 없이 이러한 언어의 바다를 자유롭게 항해할 수 있다."
김만수, <소피스트의 세계: 놀이와 해방의 산문>에서
"<협죽도 그늘 아래>라는 소설은 시에 뒤떨어진 소설이라기보다는 소설과 시가 뒤섞여 생성된 새로운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을 아무 데서나 읽어도 된다고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시의 행들을 아무렇게나 뒤바꿔서 읽는 것만큼이나 무모한 일이다. 물론 이러한 소설 형식은 아주 빨리 실험성을 잃고 관습화하리라.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계 속에서 모든 새로운 것들은 얼마나 빨리 낡아빠진 것으로 되어버리던가. 작가는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지각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생성중이며, 이러한 사실이야말로 언제나 존중되어야 한다."
손종업, <물처럼 자유로운 펜의 놀이>에서
성석제의 소설은 기본적으로 ‘인간 예찬’이다.일찍이 그는 “인간의 명목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관심, “특히, 더럽고 가난하며 고통받는 모든 인간”의 웃음에 대한 애정을 고백한 바 있다.그는 그 인간들, 한 번도 역사의 전면, 소설의 표면에 등장해보지 못한 그 인간들을 부활시키기 위해 기존 소설의 반대편으로 우회해 들어간다. 우회의 결과로 나타난 것은 시도 소설도 아니며 그렇다고 농담이나 이야기도 아닌, 도대체 뭐라 규정키 힘든 특이한 형태의 담론인 ‘성석제표 소설’이다.
- 신수정, <신수정의 문학리뷰: 홀림>에서
성석제의 글은 위험하다. 폭발물이기 때문이다. 이 폭발물은 독자의 눈길이 가 닿는 순간, 째깍째깍 초침이 돌아간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아직 실밥을 뽑지 않은 환자, 만삭의 임산부, 조증 상태의 우울증 환자, 시험을 코앞에 둔 학생들에게는 이 책을 권하고 싶지 않다. 다시 수술을 해야 하거나 시험을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독자들은 그토록 부상 -재채기처럼 연속적으로 터져나오는 웃음 말이다-을 당하면서도 책을 덮지 않는다. 웃음 폭탄 세례를 받을 때마다 나와 너, 이웃과 세상이 전혀 새롭게 보이기 때문이다. - 이문재(시인), <재미나는 인생> 추천의 말에서
성석제 소설의 남다른 매력은 무엇보다도 그의 뛰어난 언어감각에서 온다. 시인 출신의 소설가라는 이력을 입증이라도 하듯, 그의 문장은 시적인 함축과 산문의 개방성을 겸비하고 있으며, 고문(古文)의 유장한 호흡과 현대문의 발랄한 리듬을 자재하게 넘나든다. 범속한 일상의 표면에서 생의 비밀을 들춰내는 섬세한 관찰력, 날렵한 비유와 의뭉스런 유머, 빠르고 정확한 달변의 화술, 간혼 말 자체의 리듬에 들려 주제에 비해 수사가 과한 경우도 없지 않지만, 이 작가가 아주 매력적으로 생동하는 말의 향연을 주재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진정석 <길 위이 소설, 소설의 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