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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섭: 소설가 염상섭의 배후에는 기자 염상섭이 있었다.

딜쿠샤 2013. 1. 11. 23:19

 

 

“평생을 전업작가로 일관한 염상섭이 유일하게 가졌던 직업은 신문기자였다. 사실 한국의 근대소설과 저널리즘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탄생 단계부터 뗄 수 없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개화기의 대표적인 서사장르인 신소설부터가 직업 문인에 의해 씌어진 것이 아니라 저널리즘의 필요에 의해 기자 겸 소설가들이 생산한 것이었다. 저널리즘의 본격화와 소설의 탄생이 병행하는 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여서 1900년까지 기자가 소속 신문에 연재소설을 쓰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으며,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 디포우는 영국 근대소설의 선구자인 동시에 유력한 언론인이기도 했다. 근대적 문학제도 하에서 작가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직종이 신문과 잡지였고, 실제로 많은 문인들이 기자직을 병행했지만, 그 지속성과 꾸준함에 있어서 염상섭에 비길만한 경우는 거의 없다. 염상섭의 신문기자 생활은 일시적인 외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1920년 ?동아일보? 정경부 기자시절부터, 1947년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그만둘 때까지, 30녀 가까운 기간 동안 단속적인 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특징을 보여준다. 그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 이른바 3대 민간지를 비롯,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까지 일제 시대에 한국어로 발행도던 4대 신문사를 두루 거치고 있는데, 당시 문인은 물론 전문 언론인 가운데도 이 경력을 가진 인물은 별로 없다. 물론 여러 신문사를 전전한 것이 직업적 능력의 우수함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지만, 타협을 모르는 개인적 기질 탓에 한 군데 오래 머물지 못했음을 짐작한다면, 염상섭은 그만큼 신문사가 요구하는 기능을 갖춘 유능한 언론인이었던 셈이다. 염상섭의 기자 경력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학예부 기자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기자 생활은 1930년대 구인회 멤버들의 경우처럼, 문학과 저널리즘 사이에 형성된 학예면의 공간과 거의 무관하다. 그는 저널리즘 경력을 통해 점차 근대적으로 분화되어가는 사회 제도의 속성과 본질을 파악하는 안목을 얻었으며, 문학의 자율성과 기능성을 동시에 고려하는 균형잡힌 시각을 확보할 수 있었다. 작가 염상섭의 배후에는 저널리스트 염상섭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염상섭 스스로도 문학과 저널리즘을 별개로 여지기 않았음을 여러 차례 밝히고 있다.”       진정석, <염상섭 문학에 나타난 서사적 정체성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6. pp.57~58. 각주 13번.

 

 

 

= 물론 다른 논자들도 염상섭의 기자생활에 대한 언급은 했다. 하지만 문학 활동과의 관계 속에서 짚어낸 언급으로 이보다 직접적인 주목을 한 경우는 보기 힘들다. 물론 이러한 전제에서 설명하고 있는 연구가 김윤식의 ?염상섭 연구?이긴 하지만. 그런데 진정석의 설명에서 1) 염상섭은 학예부에 간여한 적이 없다,는 서술은 잘못이다. 염상섭은 ?조선일보? 시절 학예면에 새로운 기획을 시도한 바 있지만 ‘실패’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저널리즘 경력을 통해 점차 근대적으로 분화되어가는 사회 제도의 속성과 본질을 파악하는 안목을 얻었으며, 문학의 자율성과 기능성을 동시에 고려하는 균형잡힌 시각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진술의 중요성. 염상섭의 저널리즘 체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의 소설 창작에 영향을 끼쳤는지 설명하고자 할 때, ‘정치적 감각’(김윤식)과 현실인식의 차원 정도에서 추론될 수 있었지만, 이 진술에서와 같이 ‘사회제도의 속성과 본질 파악’ 및 ‘문학의 자율성과 기능성’을 동시에 파악할 수 있었다는 설명은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된다. 저널리즘은 근대 사회제도의 속성과 본질을 그 어떤 것보다 잘 담아내고 있는 매체다,는 말과 그에 대한 인식과 문학인식의 관계에서 문학의 자율성(기능성)에 대한 인식이 가능할 수 있었다는 유추는 염상섭의 ‘문학의 자율성 혹은 기능성’에 대한 인식의 특징, 변화과정, 창작방법 등으로 더 구체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내 숙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