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애 <근대소설의 장르분화와 연설의 미디어적 연계성 연구> 리뷰
홍순애, <근대소설의 장르분화와 연설의 미디어적 연계성 연구: 1920-30년대를 중심으로>, <<어문연구>>37-4, 2009.가을.
"연설이 단순히 의사소통의 설득을 위한 도구적 차원과 도덕성의 실천적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학적인 표현의 영역을 포함하면서 청중의 자기 성찰과 근대적 개인상의 구축을 가능하게 했다."(364)
근대계몽기의 연설: 문명과 지식, 계몽의 담론을 전달하는 역할과 이로 인한 공적인 효과를 생산하는 미디어의 역할을 자임.
1910년대의 연설 : 식민권력에 의한 정치적 수사와 식민화를 위한 동화와 동원의 체계 속에 위치하였으며, 동경유학생 학우회의 연설은 문명의 개혁과 실력양성을 위한 문화운동의 차원에서 연설, 강연, 웅변대회가 개최됨. "이시기 연설은 청중이라는 대상을 호명하는 방식, 구술체의 말하기 특성, 파토스를 중심으로 연행되는 연설의 성격과 고백체 서간의 수신자를 허구적으로 상정하고 내면을 감성의 언어로 전달하고자 하자는 특성이 결합하여 '연설체 서간문'을 형성하며 문학장과 연계되었다."(366)
<연설장을 둘러싼 공론의 전유와 연설 주체들의 길항 관계>
1920~30년대 연설: 1) 식민권력에 의한 식민지 규율을 강제하기 위한 총독부 주관의 강연회, 2) 유학생 강연단의 개조론에 입각한 강연회, 3)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열린 계급투쟁과 노동자 권익을 위한 사상강연 등.
<'연설체 소설'의 분화와 소설장르의 개방성>
" 1910년대 연설은 고백체 서사의 일종인 서간체 소설에서 수신자에게 사적인 고백을 대신하여 설득과 비판적 언술을 장문에 걸쳐 발언하는 '연설체 서간'으로 분화되었다. 그 예로 이광수의 [어린 벗에게], 나혜석의 [잡감(K언니에게 여함] 등과 <학지광>에 게재된 서간문에는 조혼의 폐해와 전통적 제도의 비합리성 또는 조선 여자의 현실에 대한 공적인 계몽 담론을 연설체의 파토스적 언어로 적고 있다. 1910년대 소설에서는 서간과 연설의 다중성을 포함함으로써 소설이 분화된 '연설체 서간'을 형성하였다."(374)
* 1920년대 초의 내면-고백체 소설에서는 정치적이고 계몽적인 연설적 언술은 소설의 언어로 고려되고 있지 않다. 하지만 192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브나로드 운동을 소개하고 있는 농촌 소설과 카프소설, 노동자 소설에서의 사회주의 사상의 효율적인 전달을 위해 서사 안에 연설적 언술이 배치되기 시작한다.
"연설적 언술의 차용이 소설에서 나타나면서 본격적인 '연설체 소설'의 장르가 생성된다. 직접적인 작가의 이데올로기가 언술에 개입되는 '연설체 소설'은 작중인물의 대화로 담화를 구성하고, 스토리 층위에서는 연설회 장면이 삽입된다."(375-6)
"연설은 연설자가 특정한 주제에 대해 정리된 내용을 전달하는 논증의 행위이며, 이를 통해 지지, 호소, 설득의 효과를 얻으려는 의사전달 행위이다. 연사는 청중을 설득하기 위해 신체적 언어 즉 목소리나 태도 등을 규범화 하여 연설의 효과를 증대시키고, 청중은 박수로써 연사의 의견에 대해 동의하면서 단순한 수용자가 아니라 중요한 참여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상호소통으써의 연설 미디어의 성격은 1920-30년대 농민소성과 카프계 소설에서 농촌 현실에 대한 계몽의 필요성과 사회주의 계급투쟁의 정당성을 전파하기 위해 차용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차용의 결과는 1910년대 '연설체 서간'에 이어 1920-30년대에는 '연설체 소설'의 새로운 장르로 분화되었다. 일상에서 제도화된 연설의 담론이 공적담론의 일부로써 소설에 이입되어 '연설체 소설'로 장르분화 된 것은 연설의 감성적이고 선동적인 언어에 대한 소설가들의 관심의 결과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소설이 갖는 장르적 개방성의 일면이라 할 수 있다."(380-1)
"1920-30년대 소설에서 화자의 연설적 언술의 차용은 당대 사회적 대주으이 목소리를 대신할 화자의 필연성과 문장을 초월하는 감정 이입적인 언어로 감성의 공유를 시도하는 작가들의 변화된 장르의식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381)
"연설과 소설장르가 식민권력에 의한 강압적인 정치적 현실, 가난과 기아로 점철된 피식민지의 상황에서 대중을 계몽하고 식민정책을 비판하는 공적 담론을 연사의 목소리와 작가의 언어로 전달했다는 점과 이 두 차별화된 장르가 민족과 계급이라는 집단적 이데올로기의 전파를 위해 서로 연계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식민지 시기 공식적 의사소통과 비공식적 의사소통간의 대규모적 접촉 이외에 자신의 의견을 문학적으로 형성하려는 작가의 의도는 당대 연행된 연설과 강연이 일상에서 대중적으로 존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낯설지 않은 소통의 방식을 차용함으로써 작가는 좀 더 주제에 밀착된 언술을 화자를 통해 전달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공공영역의 범위 안에 논의될 문제가 소설의 연설적 발화를 통해 언급된다는 것은 현실적 문제를 독자와 공유하고자 하는 것을 제안하는 것이며, 동시에 문제 해결을 위해 작가와 독자의 관계가 새롭게 설정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다시말해 사회 문제에 대한 작가의 이데올로시가 연설적 발화를 통해 직접 소설에 기표됨으로써 보다 용이하게 소설의 주제가 전달되고, 이로 말미암아 공론 형성은 자연스럽게 문학장을 통해 형성되었던 것이다."(381-282)
* 1920-30년대 소설에서 연설체 언술의 이입은 화자의 문제와 독자-작가와의 관계 재설정과 아울러 서사구조의 변화를 가져왔다. "목적 지향, 성취지향의 서사구조는 연설이 소설에 이입된 결과로 나타난 '연설체 소설' 장르의 서사구조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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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애 선생의 논의를 도식적으로 정리해보면 <1910년대 '연설체 서간문', 1920년대 초의 '내면-고백체에서 '연설체 소설'로의 장르분화>.
이렇게 보면 이 가설은 결국 한국 근대소설의 "계몽주의적 성격" 혹은 "계몽소설"의 특성을 '연설'이라는 미디어와의 연계 속에서 고찰했다는 평가를 할 수 있겠다. 한국근대소설 가운데 특히 장편소설의 중요한 한 특징을 이루고 있는 계몽주의 혹은 계몽성에 대한 재평가에 해당하는 논의라 할 만하다. 김윤식은 이러한 장편소설의 계몽적 성적을 신문연재소설의 한 특징이라고 말한 바 있기도 하지만, 그것은 문학 외적 환경과의 상호작용의 결과라기보다 매체 결정론적 진단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홍순애의 논의는 문학 외적 환경과 문학(소설)의 상호작용의 특징으로 분석하고 있어 의미가 있다.
연설을 중심에 놓게 되면 홍순애의 논의에서처럼 계몽(주의)적 성격의 소설이 논의의 주요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특징이 이광수를 비롯한 한국근대소설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이러한 구도에서 보면 염상섭의 소설은 예외적이고 "反연설적이다." <연설체 소설>과 다른 염상섭의 소설을 <토론 소설>이라고 할 수 없을까? 이때 <토론>은 내면을 발견한 근대개인들이 어떤 사안에 대해 동등한 자격으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는 의미의 '토론'이다. 연설이 설득과 계몽의 서사를 인물들의 <사제관계> 구조로 드러낸다면, <토론>은 인물들의 관계를 <동개인 대 개인>의 관계로 드러내며, 토론의 과정만이 있을 뿐 해당 사안의 결론은 지연되는 구조를 띤다. 그것이 염상섭 소설의 한 특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