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생각하기

김용택의 <엽서>

딜쿠샤 2006. 5. 24. 06:24
 

엽 서

          김용택


산 아래

동네가 참 좋습니다

벼 익는 논에 해 지는 모습도 그렇고

강가의 풀색도 참 곱습니다

나는 지금 해가 지는 초가을

소슬한 바람이 부는 산 아래 쓸쓸하게 서 있답니다

두 손을 편하게 내려놓으니 맘이 이렇게 편안하네요

가을에는 서쪽이

좋습니다

                             문학동네. 99, 봄

 


 등산을 좋아하시는지요? 저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자랐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니지만 -초등학교 담장이 지금은 그렇게 낮아 보이듯- 그땐 멀고도 높은 곳이었지요. 그런데 저 산 너머 어떤 마을이 있을까? 텔레비전에 나오는 세계가 있을까,하는 호기심은 가졌지만 다른 형들처럼 그 산을 넘어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저 들려주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저 멀리 보이는 제일 높은 산을 올라갔다 온 형들이 부럽기만 했지요. 저도 그때 그 산을 그 후에 오른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어릴 때 별천지로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오히려 한 폭의 아련한 ‘풍경’일 따름이었습니다.

 제가 다따가 등산 이야기를 하는가 묻고 있군요. 등산이 ‘근대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등산의 근대성이라고 할까요. 우리는 지금 여가 생활로 혹은 건강을 위해 등산을 합니다. 그리고 허영호 같은 ‘정복가’도 있구요. 이러나 저러나 등산은 근대적인 것이라는 거지요. 매킨토시라는 사람은 근대 스포츠를 분류하면서 그 두드러진 특징을 극복 스포츠의 등장에서 찾았다는군요. 그것의 대표적인 것이 등산인데, 근대 등산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전과 정복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던 자연이, 개발되고 착취되는 정복의 대상으로 변모하는 근대적 자연관의 출현과도 관련이 있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근대 이전 등산은 어땠을까요. 앞에 것에 비추어 보건데, 그것은 어디를 가기 위한 이동 이상의 산은 아니었겠지요. 그리고 산의 상상력이랄까요, 그것의 품성을 닮고져 하는 인식도 있었겠고 도피의 세계일 수도 있었겠지요. 이렇게 보면 분명 등산의 근대성은 어느 정도 성립이 됩니다.

 조금 더 옆길로 나가보면, 언젠가 다른 시읽기에서도 말했지만, ‘풍경의 발견’이라는 근대성과도 관련이 있지요. 고진의 글(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등산은 그때까지 터부나 가치에 의해 구분되었던 질적 공간을 변경시키고 균질화시키는 일 없이는 존재 불가능한 것이다”(41면)라는 구절 말입니다. 이러한 인식론적 바탕 위에 근대 문학의 리얼리즘도 확립되는 것이라는 얘기지요.

 여기까지 등산과 풍경의 발견을 길게 언급한 이유는 김용택의 <등산>을 읽으며 이 시인의 등산은 ‘근대적 의미의 등산’을 반성하게 하는 메시지를 담는 것으로 읽히기 때문입니다. 두 주먹 불끈 쥐고 씩씩거리며 저 정상을 정복하기 위해 오르는 근대인,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지요. 그런데 시인의 등산은 너무나 한가하고 편안하고 ‘쉼의 미학’을 담고 있습니다.

 시인은 첫 행에, 그리고 다섯째 행에 똑같이 ‘산 아래’라는 표현을 썼군요. 그러나 이 둘의 위치는 그 의미만큼이나 다릅니다. 앞의 것은 ‘산 아래’를 굽어보는 시인의 위치를 말하고 있고, 뒤의 것은 ‘산 아래’ 있는 시인(나)의 위치를 말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시인은 지금 산 ‘정상’에 있지 않군요. 이것은 중요한 사실인데, 산 ‘정상’을 정복한 자의 시선 느낄 수 있는 그런 표현이 이 시 속에 없는 것과도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저 산을 넘고야 말겠다는 자의 시선에는, 정상에서의 시선에는 벼 “익는” 논의 모습도 강가의 풀색도 모두 희미할 뿐입니다. 시인(나)는 적당한 거리, 중턱에 있기에 그 “익는”의 현재 진행형까지 읽을 수 있는 거지요. 너무 억지입니까. 그렇다면 산 중턱쯤에서 불끈 쥐었던 주먹-이는 우리 인생의 출발과도 같은 것-을 “편안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시인(나)의 행동은 어떻습니까. 뒤돌아보지 않고 정상만을 향하는 자는 가질 수도 볼 수도 없는 ‘마음’과 ‘시선’아닙니까.

 시인이 어디에선가 띄운 이 한 장의 엽서의 의미가 제게는 아름다운 서정시 한 편 이상으로 읽히는 것은 이와 같은 까닭입니다. 우리의 몸(육체)까지 철저하게 작동시키고 있는 근대인으로서의 이성과 야망, 이것은 어쩌면 에베레스트 정상에 도전하는 등반가처럼 어쩔 수 없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한번쯤 뒤돌아보며 쉴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는 그 속의 나를 쉬지 못하게 합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약육강식의 세계라는 표현이 답답합니다. 하지만 이 시를 읽어보십시오. 앞서 “쉼의 미학”이라 명한 저의 읽기는-시인의 것은 아닐 지라도- 그것을 느끼게 해 줄 것입니다.

 이 글을 저장시키고 나면, 저는 이 글을 쓰기 위해 ‘폈던 두 손’을 다시 쥐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두 손을 편안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기회로 시읽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합니다. 이 글이 시인의 엽서처럼 여러분의 마음을 편안하게 할 수 있을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