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규의 <보리수가 갑자기>
보리수가 갑자기
김광규
바람 한 점 없이
무더운 한낮
대웅전 앞뜰에서 삼백 년을 살아온 나무
엄청나게 큰 보리수가 갑자기
움찔한다
까치 한 마리가 날아들어
어디를 건드린 듯
숨겨진 급소가 없다면
벗어나야 할 삶이 있을까
이 詩를 처음 읽었을 땐 아주 어렵게 생각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확실히는 모르지만 흔히 하는 말로 존재의 핵심을 꿰뚫는 한 줄기 빛 같은 것이 이 시에 보였다고 할까. 그러나 그것을 생각할수록 난해하기만 했다. 물론 그러한 측면에서 이 시가 읽혀져야 하겠지만 며칠 이 시를 들여다보면서 재미있는 상상을 해 보게 되었다.
왜 ‘삼백 년을 살아온’ ‘엄청나게 큰’ 늙은(?) 보리수가 갑자기/ 움찔’ 했을까. 정말 ‘까치 한 마리가 날아들어’ 그곳(?)을 ‘건드린 것’일까. 삼백 살 먹은 늙은 보리수는 다른 곳도 아닌 대웅전 앞에서 그 세월을 살아왔다. 그 보리수는 그 세월 동안 道(진리)를 깨우치기 위해 하루도 빼먹지 않고 대웅전을 드나드는 수도승을 보아왔을 것이다. 많은 수도승들의 내력이 보리수 나무에 각인 되었을 테고, 보리수 자신도 대웅전 불상을 향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어느 수도승 못지 않은 수도를 했다면 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부처가 수도한 곳도 보리수 나무 아래가 아니었는가. 그러한 보리수가, 엄청나게 큰 보리수가 “바람 한 점 없이/ 무더운 한낮”에 “갑자기/ 움찔한다”. 여기서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운 한낮’이라는 표현은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해보자.
요즘 절 입구에서는 이런 푯말을 볼 수 있다. ‘여기서부터는 수도승이 수도를 하는 곳이므로 정숙해 주십시오.’ 이러한 구문은 그리 어색하지 않은데, 요즘은 덧붙여 옷차림 대한 주의를 당부하고 있기도 하다. 요즘 젊은이들 가운데, 특히 젊은 여성들 가운데에는 반바지에 배꼽티를 입고 선글라스까지 끼고 절을 찾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절 입구에 이러한 차림에 대한 주의를 당부하는 푯말을 보노라면 그 글씨의 모양에까지 수도승들의 인내(?)가 느껴지기까지 한다. 세속적인 삶을 벗어나, 즉 탈속과 해탈의 경지를 위해 절[寺]이라는 공간을 선택한 수도승들에게 그러한 차림의 여성들의 육체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안돼, 참아야돼’라는 표현이 ‘옷차림 주의’라는 푯말 속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자연스런 욕망을 참고 인내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고, 그러기에 수녀와 수도승의 길이 고귀(?)한 것이 아닌가.
다시 보리수로 돌아와서.
‘바람 한 점 없이/ 무더운 한 낮’에 어느 절 대웅전 앞에 쫄티에 반바지를 입고 선글라스까지 쓴 탄력적인(?) 피부를 뽐내는 한 여성이 찾아왔나 보다. 그 여성은 수도승을 유혹하려고 그런 차림으로 온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이 절을 찾는 이유 가운데 여행이나 관광의 목적이 있으니 그 차림은 그 여성에겐 자연스러운 것이다.(절 입구에서 표까지 주고서 관광 상품을 사러 온 것일까) 대웅전 앞뜰에서 수도를 삼백 년이나 한 보리수가 이 여성을 목격하고 말았다. 여기서 시인은 “까치 한 마리가 날아”든 것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 까치의 유연하고 매력적인 곡선과 깃털의 자태는 여성의 이미지로 읽어도 별 무리가 없을 듯하다. 늘씬한 까치(육체, 성적 욕망)가 날아들었을 때, 삼백 년의 내공을 쌓아온 보리수가 과연 무관심할 수 있었을까. 주지하다시피 몸은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이게 되어있다. 五感이 그렇듯 교리적 이성에 앞서 몸은 먼저 반응하게 된다. 보리수 그것도 삼백 년이나 수도한 엄청나게 큰 보리수가 “갑자기/ 움찔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시인은 보리수의 “움찔함”의 원인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숨겨진 급소가 없다면/ 벗어나야 할 삶이 있을까”라고. 그렇다. 숨겨진 급소가 있기 때문에 修道도 해탈도 삶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보리수가 삼백 년을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저 움찔하는 몸의 솔직한 반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급소는 숨겨야지 드러냈다간 그야말로 치명적이지 않은가. 그리고 급소의 표면적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감추어야지 온몸이 급소라면 미풍에도 죽어야 하지 않은가. 따라서 탈속과 해탈은 급소를 숨기는 것이다. 쉬운 말로 내공을 기르는 것이다. 급소를 최소화하기, 이것은 해탈과 비례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수도승 보리수는 보이지 말아야 할 급소를 시인에게 들키고 말았다. 시인은 그러한 보리수의 급소를 목격했지만 그것을 비난하거나 불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로 ‘숨겨진 급소가 없다면/ 벗어나야 할 삶’도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이 시의 매력은 보리수의 ‘움찔’하는 모습과 그 순간을 포착한 시인의 표정이 겹쳐져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급소를 들켜버린 자와 그 급소를 목격한 자의 서로에 대한 시선은 똑같이 놀란 표정이 아니겠는가. 단 몇 줄의 경제적인 언어로 시를 구성해 놓았지만 마치 나의 급소를 들켜버린 듯 나는 급소를 찔려버린 듯 <움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