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만식 <문학을 나처럼 해서는 못쓴다>(문장, 1940.02)
"처음 얼마 동안 학예부 일을 볼 때는 그래도 아직 애송이 서생이더니, 사회부 외근 기자가 되면서부터는 24,5세가 되도록 통히 모르던 술과 기집의 세계가 시방 사변 전의 상화와 같이 임의로왔다. 더우기 요새처럼 신문기자가 회사원이 아니요, 괜히 좀 어깨가 어쓱한 무엇이 있을 시절, 해서 직함이 신문기자씨이겠다, 하루 일 뚝딱 마치고는 좋은 친구 얼려 술 먹고 놀고, 참말 호강을 하는 것 같아 즐거웠었다."(전집10, 533)
"지나간 병자년까지 근 10년을 혹은 방탕하여, 혹은 직업에 정말 쪼들려, 또 혹은 이른바 생각하는 바 있어, 문학을 의붓자식같이 등한히 해왔었다./ 그 사이 다만 개벽사에 있을 동안이 그래도 정신을 약간 차려 소설도 더러 많이 쓰곤 했던 동안이라지만, 역시 반은 여기삼아서 한 노릇이었었다. 하다가 병자년 정월 마지막으로 보선일보사를 나오게 됨으로써 직업이라는 것과 아주 손을 끊고서 비로서 눈을 뒤집어 쓰고 문학가 단판씨름을 하기 시작했었다."(전집10, 534)
상섭을 좋아했고, 동인을 좋아했고, 고산저우의 글과 하목 상을 좀 읽었고 투르기네프의 <엽인일기>는 사오독했다.
요새는 문학이 문학이 아니라 자살용의 양잿물이더라고.
*********************************************************
채만식은 저널리스트로서의 삶과 문인으로서의 삶을 위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몇 가지 주목되는 부분은 1) 1920년대 중반의 신문기자 시절에 대한 기억 중에 작금의 회사원으로서의 신문기자와는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는 점, 2) 잡지사(개벽) 시절의 활동을 문학보다 더 중요한 '이른바 생각하는 바 있어'라고 기억하고 있다는 점, 3) 1936년 신문기자직을 떠나 문인으로서의 삶에 본격적으로 나선 (문학과의 단판씨름) 뒤의 내면 풍경 등을 읽을 수 있다.
채만식의 기자생활
1925.07-1926.10: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1930-1933: ?개벽? 사원
1933-1936: ?조선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