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기자인 P, R, Y는 퇴폐하여 가는 조선 사회 속에서 모든 희망을 잃고 하루하루 술로 버티며 살아간다. 그러던 중 이들은 술집에서 술을 마시는데 물건을 팔러 들어온 젊은 여자 방물장사의 고단하고 기구한 사연을 듣게 된다. 모든 무슨 계급에 처한 남녀가 그녀와 같은 유린을 당한다는 생각에 이른 신문기자들은 모든 "부르주아를 박멸하여야 한다"고 외친다. 이들은 이때까지의 자신들의 생황에 부끄르움을 느끼며 민중을 위해 일하겠다던 자신들의 삶을 반성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다른 방에서 술 취한 자들로부터 지갑을 훔쳤다며 폭행을 당하는 여자의 부르짖음이 들린다. 그녀를 때리는 남자들에게 주먹을 날린 세 사람의 마음에는 "한 가시로 흥분된 뜨거운 정열의 불길"이 타오르게 된다. 이튿날 "부르주아 사회가 생기게 한 공장주의 잔인횡포와, 어린 양 같은 여직공의 참담한 생활이면"이라는 기사를 신문 사회면에 쓴 P는 비록 신문이 압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밤의 사건을 통해 자신의 피로하였던 신경이 새로운 자극을 받았음을 느끼고 "아래로부터 구렁텅이로부터 새로운 광명의 진리"를 잡을 것을 결심한다.
= 이 소설의 기자-여인의 관계가 <입증하고 있듯이, 주인공의 이념적 각성이 자신보다 더 약하고 비참한 타인을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바꾸어 말하면 더 약하고 불쌍한 타인의 불행 없이는 '나'의 지각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강읺고 자의식 강하며 능력있는 남성주인공들의 시선 속에서 왜 핍박받는 노인이나 여성 인물들이 한결같이 무력하고 무지하며 무능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맞닿아 있다. 결국 타인의 고통을 표본화하는 주인공의 일방적 의지는 연극의 속성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동정의 메커니즘 속에서 제대로 파악될 수 있다. 레비나스의 지적대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거리를 두고 관조하는 것은 곧 타인의 고통을 나의 의식 속에 의미로 환원시켜 나에게 종속시키는 일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의미로 환원된 고통은 이미 고통이 아니다. 의미로서 고통은 아프지 않다. 요컨대 하층민의 수난을 보거나 들음으로써 촉발된 주인공의 동정이 분노를 거쳐 계급의식으로 변모하는 양상을 보이는 일련의 작품들 속에서 주인공의 눈과 귀는 분명 세상과의 소통을 향해 열려 있지만, 동시에 이들은 타인의 삶을 표본화하는 연극적 동력에 의해 자아의 관념을 강화하거나 확대하는 인물로 형상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손유경, 박사논문, 157면)
= <[사건!]에서 작가의 지향은 사회 조직과의 타협을 통해 절망과 타락에 바져 온 지난 삶을 반성하고 '새로운 광명의 진리'(175쪽)을 향한 '새로운 투쟁'에 놓여 있다. 이러한 주제 의식은, 첫째로 작가의 언어와는 거리를 띄운 인물들의 언어에 부분적으로 대치되어 있는 권위적인 말에 의해서 둘째로 담담하게 상황을 서술하는 서술자와 간혼 분리되는 작가의 언어를 통해서, '언어적 다양성'의 한 요소로 드러남으로써, 구호화의 차원을 벗어나 당대의 현실 문제에 대한 하나의 문학적 처방으로 구현되어 있다고 하겠자.>(박상준, 조선자연주의 소설론, 108면)
<신문이라는 것이 현대 사회 조직의 하나라는 것, 따라서 압박과 착취가 심한 당대에서는 그에 타협하여 '사회 안에서 생기는 일을 너무도 객관적으로 주으러 다니는'(167쪽)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는 것, 그 결과 '근본 문제로 보면' 신문사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에까지 인식이 미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이 작가의 언어가 일방적으로 전횡하는 형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물들의 언어와 작가-서술자의 언어의 혼성을 통해서 제시됨으로 해서 적어도 [윤전기]에 비해 언어적 다양성을 재고시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엄밀한 의미의 언어적 다양성-다성성이란 그 이데올로기적 함의가 다른 언어들 사이에서 증폭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여기서, 본고가 다루려는 1920년대 중엽의 소설들은 당대 현실의 수용이라는 새로운 국면에 막 접어들고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언어적 다양성이, 현실에 대한 여러 가치 평가적 입장의 상호 교차가 작품 속에서 물화되는 것임을 염두에 둔다면, 본고의 논의가 갖는 의미망을 간추리는 데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박상준, 1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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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섭의 1920년대 중반 소설의 의미: ‘토론의 서사화’ 가능성
박상준의 이 논법을 염상섭의 경우에 확대할 때 새로운 논의를 할 수 있게 된다. <윤전기>를 대상으로 “염상섭의 시각은 시종일관 반노동자적-관념적 태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리얼리티의 확보에 실패하고 말았다”(111면)고 보는데, 이는 ‘인물의 메가폰화’ 현상을 낳았다는 것이다. 염상섭의 <윤전기>나 <E선생>, 그리고 <진주는 주엇스나>에서 교사, 기자 등의 주인공 인물들이 보이는 ‘인물의 메가폰화’, 즉 연설의 언어가 솟아나 있는 것은 사실이다. 초기의 (내적)고백-연설-토론의 변화과정을 염두에 둘 때, <윤전기> 등의 연설은 어떤 내적 사정이 있을 수 있다. 사안의 논쟁을 소설담론으로 수렴하는 과정에 이데올로기(이념)의 수용이 필연적(바흐찐)임을 염두에 둘 때, 이 작품군들에서 확인되는 연설담론은 ‘고발과 폭로’의 욕망이 앞선 까닭이다. ‘미학화’의 욕망과 폭로의 욕망이 결합될 때 ‘토론의 서사화’가 가능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현실 폭로와 고발이라는 욕망과 <타인의 비밀과 불행한 사연을 폭로하고 극적으로 재현하려는 욕망을 동시에 구현하고>(손유경, 108면)자 하는 욕망이 만나는 장면에서 염상섭의 소설은 ‘토론(논쟁)의 서사화’로 나아갈 수 있었다. <너희들은 무엇을 어덧느냐>와 <사랑과 죄>가 그것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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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생활)의 수용>이라는 1920년대 중반의 소설사적 과제 해명의 방향.
1. 언어적 측면에서의 변화(박상준)
2. 장르(양식)적 변화(이경돈)
3. 저널리즘의 변화(신문체험-기자), 제도 매체적 환경의 변화(이희정, 박정희)
4. 사상적(사조, 시대사상) 변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