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筆生活十五年 /염상섭
소위 文筆生活이라는 것이 15년은 되엇는가 봅니다. 그리 긴 歲月은 아닌것 갓슴니다마는 그 첫 出發이나 15년 지낸 오늘날이나 그저 제 턱이오 別進境이라든지 혹은 소위 劃期的이라고 스스로라도 생각할 만한 아모것도 업는 것을 생각하면 도리어 15년이 퍽이나 긴 歲月가티 생각됨니다. 일업는 사람에게는 세월이 긴거와가티 何等 刺戟도 하등의 感激도 하등의 變化도 업시 15년을 그대로 朦朧히, 혹은 그대로 끌려가며 지내왓스니 다시 말하면 無爲히 지내온 세음이니 15년歲月이 夏日의 牛涎과가티 기럿든 듯이 생각이 된다는 말이외다. 그럼으로 15년동안 혹 쓴 것들이 잇대야 모도 불구덩이에 쓰러너허도 조금도 앗가운 생각이 업슴니다. 조금도 謙辭가 아니외다. 아니 당연히 불구덩이에 쓰러너흘 것이요 또 그러케 될 것이외다. 그만치 自己作品에 대하야 愛着도 업고, 또 그럼으로 전에는 자기가 쓴 것을 다소간 蒐集하야 두든 것을 인제는 그것조차 게을러지고 혹 엇던 사람이 出版을 周旋하라고 慫慂하는 일도 잇스나 그럴 생각도 업슴니다.
그러키 때문에 인제는 아모조록 안쓰기가 爲主입니다. 만일 面에 못이기는 塞責이라든지 잔用兩이나 어더쓰랴는 切迫한 사정이나 욕심만 업스면 적어도 10년동안 혹은 平生에 안 쓴대도 섭섭할 일은 업슬 상 십흔 생각이 무럭무럭 납니다. 生活維持가 안된다-는 것이 당면한 問題로 혹은 첫손꼽을 수 밧게 업는 사정도 한 이유이겟지오. 그러나 설사 生計가 文筆生活로 선타할지라도 자기가 作家生活을 支掌하야 나갈만한 讀書와 努力을 줄기차게 繼續할 意力과 勤攻과 또 資力이 잇느냐는 것을 생각할 제, 늘 마음은 무거워지고 어두어지고, 消極的으로 옴추라저 드러가는 것이기때문에 이럴양이면 평생 붓을 놋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愛着이 업지안코 일생에 일이 업지는 사람이 살수 업는 것임으로 우선 限 10년 붓을 던지고 그동안 生活安定의 方途나 차리노라면 工夫도 조금은 하게 될 것이니 그때 가서 創作이고 무엇이고 헤보자. 이런 생각을 늘 하면서도 마음이 약하야 그런지 또 다시 끌리어서 물에 물타니 술에 술타니가 되어버림으로 어제가 오늘이요 오늘이 來日입니다. 그러나 그 끌닌다는 것은 역시 잔돈푼 때문일거요 그 다음에는 시침이 떼어도 조흘 자곡이건마는 面이란 것 때문인가 함니다. 사실 자조 付托을 밧고 施行치 안으면 돈이 안생기는 일이라하야 그러는 것 가티도 볼 것이요. 빗새는 듯이도 생각할 경우가 잇고 괄세한다고 惡感情을 가지기까지할 염려도 잇고 또는 여러번 尋訪하거나 사람을 보내면 미안하야서도 아니 나오는 것을 억지로 쥐어짜내든 수도 잇는 것입니다.(이러케 말하면 퍽 流行作家로서 堪當할 수 업슬만치 注文이나 밧는 듯이 들닐지도 모르나.) 여하간 하는 일 업시 나희먹어 갈스록 漸漸 더 文筆生活을 엇재 시작하얏든고하는 後悔도 아니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으로 남에게 결코 권하지 안슴니다. 권하는 것은 고사하고 作家生活을 하겟다는 사람을 말리는 때도 만슴니다. 내 경우만 가지고 남 을 忖度할 수 업는 일이요 남을 내게 비교할 것이 아니지마는 才가 잇서야 하고 識이 잇서야 하고 知가 잇서야 하고 德이 잇서야 하고 熱이 잇서야 하고 勤하여야 하고 그리고 평생먹을 만한 産이 잇서야 될 作家生活이니 文人生活하는 것을 그 아무것도 업시 단순히 中學時代에 文才의 싹이 보인다고 남이 인정해 주는 조고만 자랑이거나 또는 周圍와 世態에 刺戟되고 끌리어서 이런 길로 들어선 것을 자기는 後悔할 때가 만슴니다. 그러나 남을 말리는 理由는 간단함니다. 달리 먹을 方途가 업거든 하지마라. 그러나 作家로 나서가지고는 먹을 道理가 업고 잇든 道理도 업서 질 것이니 그 점을 충분히 생각하라고만 말하는 경우가 잇슴니다. 그것은 남의 天分을 云謂할 수 업고 또한 凡人에게 잇서서는 創作苦보다도 生活苦가 더 切實할 것이요 生活苦에 눌려서 創作에 精進못할 바에야 蟹網俱失이 될 것이기 때문이외다. 그러면 먹기만하면 고만이냐. 이러한 어려운 問題가 나옵니다. 그러나 또다시 藝術的 良心이란 집어치고 먹기를 위하야 쓴다는 것은 또 엇더케 함니까. 어려운 問題요. 이것이 作家의 띨렌마일 것 입니다. 여하간 讀書도 하고 生活에 억매지 안케 되는 때 쓰게 되면 정말 정신차리고 써 보고 십슴니다. 그 소위 허잘것 업는 名聲(?)이라느니 보다도 多少 일홈이 알리어젓다는 묵어운 짐에 눌려서 마지못해 끌려가는 作家生活이라는 것을 생각할제 마음은 묵업슴니다. 그러나 어느 時節에 豊富한 智識을 작만하고 생활에 억매이지 안코 그리고 創作的 衝動을 바다서 작품을 쓰게 될 것이냐는 것을 생각하면 더 안탁가운 일이기도 함니다. 一生에 그런 時節은 와보지 못하고 말지도 모를 것입니다. 무르심에 대하야 이것저 것 쓸 말도 업지 안코 쓰고 십흔 말도 적지 안슴니다마는 忽忙하와 이만 하야둡니다.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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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35년 6월 [삼천리]에 실린 염상섭의 글이다. '삼천리'에서 기획한 '문필생활기'라는 주제에 장혁주, 김안서, 양백화 등이 함께 실려있다. 1935년이면 염상섭이 문필활동을 한 지 15년차다. 나이는 40 직전의 해이다. 그러나 문단의 중진 가운데 중진인 염상섭의 목소리는 냉혹하다.
수많은 작품과 문제적인 작품을 쓴 작가지만, 이 글의 목소리에는 작가로서의 삶에 대한 회의가 짙게 묻어난다. 이 시기에는 매일신보에 적을 두고 있었다. 신문사에 몸을 두고 꾸준히 소설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 달후 36년 1월에 진학문의 부름을 받고 [만선일보] 편집을 맡으러 '만주'행을 감행한다.
어느 시대에 어느 작가나 그랬지만 '문학을 한다는 것의 고충'을 자신의 체험에서 묻어나는 목소리로 솔직하게 밝힌 글이다. 문인은 문인으로만 살 수 없다. 생활고와 창작고. 이 작가의 딜레마 때문에 '문학'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낭만적인 소리일 뿐. 현실은 냉정하다. 이 냉정함을, 염상섭이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리라.
1935년 염상섭의 나이와 그가 처해 있던 상황, 그 상황 속에서의 고민의 흔적을 읽는다. 이 글은 염상섭의 글이 아니라, 오늘은 나의 글이 된다. 이 시간을 통과한다는 생각을 버리자. 이 시간은 내 삶의 조건이다. 이렇게 자위하며, 속으로 운다, 오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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