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elley Fisher Fishkin, From fact to fiction : journalism & imaginative writing in America,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5.
대부분의 미국 imaginative writer들은 사실을 보도하는 기자(reporters of fact)로서 견습 생활을 했다.
저널리즘과 위대한 작가들의 픽션의 연속성continuities을 주목하지 않은 까닭에 미국 문학 역사와 전기의 중요한 양상을 놓치게 되었다. 저널리즘과 작가들의 픽션 사이의 단절discontinuities에 초점을 맞추는 데 실패했으므로 다른 서사 형식들의 경계(범위)와 가능성에 대한 통찰의 기회를 상실했다. (p.3)
개별 작가들의 초기 견습 생활은 경험의 폭을 넓혀 주었으며, 궁극적으로 위대한 상상적 작품imaginative works의 핵심을 이루었다. 세밀한 관찰자가 되게 했고, 사실을 존중하게 만들었으며, 위대한 문학적 창조물을 형상화하는 문체를 학습하게 해주었다. 수사, 요약, 위조, 위선적인 말cant 등에 대해 불신하게 되었으며, 전해들은 설명에 대해 의심하게 했고, 자신의 눈으로 보도록 강조했다.
구체성과 미국식 리얼리티의 성과인 휘트먼의 시, 마크 트웨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진실의 원천이거나 행동의 안내서로서 책의 골격에 해당하는 내용들, 드레이저의 산문들, 헤밍웨이의 간결하고 견고한 문체(사실에 대한 존경, 픽션에 대한 의심)
이러한 저널리즘에서의 견습생활은 이들 작가의 작품을 특징짓는 특별한 주제, 문체, 전략의 뿌리를 설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괄목할만한 미국문학의 미학을 고려할 수 있는 윤곽을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5)
미국문학의 미학:
‘경험에 대한 충동과 몰입’ = 사실에 대한 리포터로서 경력을 가진 작가에 대한 주목 필요. - ‘경험의 숭배’
작가들의 견습경험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에 그들 자신을 침투시켰으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보고하게 했다.
‘뉴스룸’에서 동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 무엇을 보고, 어떻게 발견하고, 그것에 대해 어떻게 쓸지에 대해 배웠다. 거기에서 그들은 시와 소설을 읽고, 대중적 유흥물과 고전물의 기이한 뒤범벅물을 읽었다.
저널리즘을 왜 떠났나? 저널리즘을 떠나고 나서 창작한 소설에 어떤 특징이 있는가?
= 공통된 테마가 반복적으로 발생한다는 점. 검열, 권태 그리고 관습적 저널리즘은 단지 제한된 방법 속에서 독자들의 마음과 감정을 드러내야하는 의미가 무엇보다 그들을 저널리즘에서 떠나게 했다? 저널리스트로서 경력 동안, 하나 혹은 여러 가지의 검열에 직면했다.
노예, 매춘, 인종주의, 경제적 불평등, 착취, 스페인 내전, 정치적 박해 등과 관련된 주제들이 그들의 소설 속에 반복해서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은 더 큰 자유를 가지고 이 문제들을 탐색했다.(작가들은 소설로 전향했다가 다시 검열에 직면하게 되는 문학 역사라는 점이 흥미롭다)
검열과 권태가 아마도 그들을 저널리즘을 떠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관습적 저널리즘의 능력으로는 그들이 직면한 세계의 복잡성을 공평하게 다루는 것에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다.(8)
작가들은 언론의 역할을 교육, 정보전달, 위선과 거짓의 가면 벗기기 등으로 이해했고, 이러한 언론의 권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신문을 진실하다고 믿고 읽는 독자들을 그것으로 고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이 신뢰trust를 축복과 부담, 그리고 자주 불편함의 원인이라고 여겼다.
관습적 저널리즘의 한계: 이미 토론된 주제를 피상적이고 형식적으로 다루고 현재라는 시간과의 관계가 결핍되고 고압적인 것에 대한 과장된 주장은, 독자 스스로 사고하게 변화시키는 데 실패한다. 시와 소설은 그러한 한계에 집중하고 넘나들기 때문에, 쓰여진 텍스트는 독자의 정신과 감정을 고무시키기 위해 계획되었다. 이것은 저널리즘은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다.(8)
1) 형식적 신문 이야기the formulaic newspaper story는 독자가 그가 읽은 사람으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게 하기 때문에, 시나 소설은 그들에게 감정적 친밀감을 고무시킨다. 저널리즘은 벤야민이 언급한 바와 같이, ‘그 자체로는 이해할 수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 디자인된 것이지만, 픽션은 픽션은 경험의 복잡성과 불투명함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이 대답하는 것보다 더 많은 문제를 야기시킨다. (9)
2) 저널리즘이 암시적으로 독자의 사고에 대한 익숙한 습관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위한 범주를 재확인시키는 반면, 상상적인 글쓰기는 이러한 습관과 범주에 도전하며, 독자들이 낯선 세계관을 갖도록 부추긴다.
3) 저널리스트로서 쓴 관습적인 논픽션 서사물은 그들이 읽은 것이 진실하다고 믿는 수동적인 독자들에게 곧이곧대로 믿게 하기 위해 계획된다. 반면 시인이나 소설가로서 쓴 자기-지우기, 전면적인, 픽션-폭발 픽션들은 창조적이고 능독적인 독자들이 그들이 읽은 모든 것에 질문을 할 수 있고 그들 자신에 대해 새로운 의미의 패턴을 재구성할 수 있게 계획된다.
4) 저널리스트는 특수한 현상이나 사건에 대한 독자의 시각을 드러내 보이기를 바라지만, 상상적인 작가는 독자의 시각(보는 관점)을 그야말로 변화시키기를 바란다. (9)
저널리스트에서 작가로의 전환의 의미:
관습적 저널리즘의 한계를 견디기 어려워지자 픽션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 움직임은 의미 있는 것이다. ‘스트레이트 보도의 구속’. 울프, 1980년대 보도기자들은 픽션 작가의 기법뿐만 아니라 관습적 저널리즘의 형식 속에서 사실을 자신의 발명으로 표현하는 특권을 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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