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염상섭의 초기 작품활동에서 <검사국대합실>의 위상?
2. <검사국대합실>은 신문기자이면서 소설가인 주인공의 이야기다. 그리고 '검사국'이라는 대상에 대한 통찰도 있다. '윤치호 사건'과 '이경옥' 사건을 병치하는 작가의 의도가 이에 대한 것으로 보인다.
3. 기사를 다루는 작가의 방법이 돋보인다. 결국 기사(현실)와 소설의 간극, 무엇이 진실인가를 묻는 작업이 이 작품의 핵심이다.
염상섭의 전반기 작품세계를 일반적으로 '환멸에서 풍속으로'(박상준), '비극적 자아의 형성과 소멸'(김명인)과 같은 관점에서 평가한다. 염상섭의 이러한 변화를 논의함에 있어, 신문기자로서의 신문사 체험이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이러한 변화의 요인으로서 '신문기자 체험'을 설정할 때, 신문사 체험이 소설 창작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밝히는 작업은 결국 작품을 둘러싼 매체환경과 작품 내적인 미학적 성과를 묻는 것이어야 한다.
1925년 7월에 [개벽]에 발표된 단편 <검사국대합실>의 주인공 '나'는 신문기자이다. 신문기자인데, 어떤 사건과 관련해 경성지방 검사국에 호출되어 와 있는데, 그것도 신문사의 편집겸 발행인을 대신해서 와 있다. 검사국대합실에서 검사의 호출을 기다리다가, 검사국에는 어울리지 않는 외모의 한 여성을 보게 된다. 신문기자로서의 제육감이 작동한다. 서물 내댓 보이는 한 청년이, 오라비인지 모르겠지만, 접수장에 쓴 이름이 '리경옥'이다. '나'는 신문기자의 호기심으로 검사국에 호출된 여자가 '어떤 종류의 여자'일지를 생각한다. '정남의 증인?'인가, '요사이 빈빈한 공산당 독립당의 혐의자의 아내?'인가, 생각을 하다가 '여자의 행색'을 다시 관찰하고는, -유록빛 치마에 희옥양복 저고리르 입고 자지빛 '숄'을 걸친 뒷모양이 수수한 것'- 여학생은 면한 듯하고, '좀 낡은 듯한 노랑목다리 구두 뒤축에 흙이 묻은 것을 그대로 신은 것을 보'고는 여염진 여편네라기보다는 '소학교 교원이거나 유치원 보모'같다고 추론한다. "그러나 저러나 버틔고 섯는 몸가지는 틔라든지 떡버러진 억개쪽지와 펑퍼짐한 엉덩판으로 보아서 벌서 어른꼴이 박힌 것은 분명하다고 혼자 생각하였다." 여기까지 이어진 '나'의 추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검사국에 불려왔는지는 알 수가 없다.
'나'는 아침 아홉시부터 와서 영문도 모르는 일에 두 시간이나 으르를 떨고 섯는 판이라 심심파적으로 식이지 안는 궁리를 혼자하고 섯섯다. 이러한 관찰과 궁리의 결과, '나'는 '어느 모로 보든지 추한 남녀관계에 참고인이나 증인으로 올 위인은 아니라고 마음속에 단정하야 버렷다.' 단정하긴 했지만, 얼마 후 주임 검사가 '조선인 M 검사'라는 말을 옆에서 듣고 귀가 번쩍한다. '수줍어하는 여자, 트레머리를 하고 노란 구두를 신은 녀학생'과 좁다란 대합실에서 슬몃슬몃 마주치면서 관찰한다.
네 시간이나 기다렸지만 안에서는 부르지 않는다. 그때 밖에서 검사국 견학자들에게 일본말로 안내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사내 총독 암살 음모 사건-윤치호 사건'. '윤치호 사건'이라는 말을 들은 '나'는 "윤치호를 첫 마지한 후에 멧 윤치호를 마젓노? 하며 작년 봄에 이 사건으로 열 몃해 만엔가 세상 구경을 하게 되엇다는 안명근인가라는 중늙이가 반장님이 되어서 사에 차저 왓슬 때 어릿어릿 하는 그를 위로 하면서 사진을 박던 생각"을 한다. 이 장면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데, '내'가 지금 와 있는 검사국은 경성지방배판소이다. 안명근 사건을 윤치호 사건으로 기억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여하튼 '첫 윤치호를 마지한 후에 멧 윤치호를 마젓노?'라는 언술을 통해, 저항이 사라져버린 그 간의 현실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그 서술은 더 이어지지 않는다. 이어질 수 없는 검열이라는 맥락을 고려할 때, 이러한 언급은 작가의 식민지의 일상의 이면을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경성재판소에 대한 정치적 이야기는 더 이어지지 않지만, 안명근 사건에 의해 환기되는 경성검사국에 대한 언술은 한 인간의 인생과 운명을 좌우한 곳, '생살여탈권을 가진 갸륵한 곳'이라는 인식으로 서술되고 있다. 안명근의 15년과 '나'의 여섯 시간의 기다림에 대한 불만이 대조를 이루면서, 결국 이 작품의 '안명근' 언술 장면은 10여년 동안의 식민지 일상의 변화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론에서 이야기하겠지만, 경성지방재판소를 둘러싼 언술의 내용의 변화를 짚어내고 있는 것이므로 중요하다. '시국, 정치 사건(윤치호 사건)'은 '치정 관련 범죄 사건'으로 변화한 시대적 변천의 맥락을 반영해주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검사국에서의 나의 기다림은 조금씩 베일을 벗게된다. 다른 신문사의 기자들이 검사국에 나타난 것이다. d사의 y와 다른 신문사의 k, t가 들어온다.
여기까지가 1장이다. 그 다음 2장은 짧다. '나'보다 늦게 온 다른 신문사 기자들이 먼저 불려 들어가고 '나'는 기다리란다. 이 세상의 보통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검사국. '재판소란 서에서 해가 뜨는 나라요, 검사란 가랑이 미트로 세상을 내다보는 축들'이라고 나는 강한 반감을 가지고, 다른 기자들과 함께 들어가 따져라도 보려는 생각만 해볼 뿐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재판소 사람들이란 장구밥 더부사리만한 경우도 못차리고' '육법전서를 몇 만독해야 사람이 요처럼 신통하게 되는가'라는 혼잣말하기. 들어갔다 나온 가자들이 검사가 공판에 들어가 세 시나 되어냐 나온다는 말을 전해주고 함께 나가자고 하나, 나는 그저 남겠다고 한다.
이 2장의 장면은 짧지만, 이 작품의 사건 전환을 위해서 꼭 필요한 장면이다.
제3장은 '나'가 회사로 돌아와, 동료기자들에게 듣게 되는 '이경옥 사건'의 실체에 대한 것이다. 동료 기자 c와 d가 전하는 '이경옥 사건'. 신문에 '로맨쓰'처럼 난 밀매음녀의 이야기, k학원인가에 다니며 순사를 뒤에 세우고 돈있는 놈을 결혼한다고 꼬여서 껍데기를 벗겨서는 불어세는 것이 전문인데 오늘내일로 본정서에 붓들려갈 것이라는 것.' 이렇게 전하는 말에, '나'는 신문기사를 밋지 못하겠다는 듯이 반문한다. 옷입은 것이라든지 수줍어하는 눈치가 그렇게 막된 것 같지는 않고 오라비를 보더라도 상당한 집자식들로 보이더라는 것. 이에 c는 '그런 계집일스록 태를 보이는 법'이라며, '여자의 선악에 일으러서는 당신쯤은 초학'이라는 어조로 답한다. c의 이러한 대답에도 나는, 그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한다.
「민중의 지도」니 「사회의 목탁」이니 「도덕상방부재」니 하지만 신문긔자 역시 사람이다. 귀신이 아닌 사람인 이상에는 남의 사행에 대하야 밋드리 꼿두리 분명히 알 수 업는 것은 물론이다. 더구나 그 녀자에게 마음을 두엇다가 뜻을 일우지 못하고 제분에 못닉여서 그 녀자에게 욕을 보이랴고 긔자를 속여 그러한 보도를 하게 하얏는지 누가 알 일이냐? 신문이 아모리 권의가 잇다 하드라도 허여간 젊은 계집의 창창한 압길을 막아 주는 것은―더구나 활자의 세력이라면 팟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고지 들을만한 이지음의 민중을 상대로 하야 그러한 사실이 잇고 업고간에 신문에 한번 나기만 하면 그 시간이 벌서 그 녀자에게 대하야는 운명의 지침(指針)을 밧구어 꼬저주는 날이다. 아모리 신문의 권위, 긔자의 신위가 소중하다드라도 일개인의 운명을 좌우하랴는 것은 무엇보다도 큰 죄악이다 ― 이러한 지론을 가진 나로서는 이러한 문뎨를 당할 때마다 량심상 가책을 늣기지 안흘 수 업섯다.
위의 인용에서와 같이 자신의 신문기자로서의 '양심'까지 피력하면서, '이경옥 사건'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직접 탐색하지 않고 형사의 말만 듣고 기사를 쓴다는 동료 기자 c의 태도에 대해
"「또 쓰다니요. 즉접 분명한 탐색을 해보지도 안코 남의 말만 듯고나서야 어떠케써요. 독립단을 수색한다든지 모방면에 활동하야 어떠한 사건을 취됴한다든지 하는 것은 간혹 허보가 잇다 하드라도 그리 과계가 업겟지만 인신에 관한 것이라든지 남의 명예훼손이 되는 긔사야 여간 신중히 안해 가지고는, 나종에 구치안흔 문뎨가 닐어나는 것은 고사하고 그 당자의 쳐디를 생각하야 주어야지요」하며 나는 그 녀자를 본 인상(印象)으로서 도뎌히 그 긔사를 미들 수 업다는 듯이 한마듸 하얏다.
그 여자의 인상이라도 본 나와 그조차 보지도 않고 경찰의 말만 받아 기사를 기자 c. c는 나에게 이경옥 사건의 전말을 나에게 전한다. <양주 젊은 청년 하나 소 팔아 서울로. 서울에서 조방군이처럼 다니는 친구가 여관집 소개. 여관집 주인 여학생 신랑감 구하는 중. 주인 녀학생 남매와 네 사람 화투작난. 빚만 소판 돈의 반. 그 친구는 이 도박 빚쟁이 친구를 도방치라하는데, 이 도박 빚쟁이는 친구의 말만 믿고 그 계집을 한 번 더 만나 보고 싶어 파고다공원 앞에서 기다리지만, 사람의 그림자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 이 청년은 수소문해봐도 친구는 간 곳이 없다. 그제야 속은 줄 알고, 홧김에 선술집에서 술김에 자신이 신세 연설토로하다가 순사가 듣고 조사하여 그 계집을 취조할 계획이라는 것. 신문사를 걸어 고소를 하겠다 돌아다니는 것이 괘심하여 혼을 내주기 위해 기사를 쓰겠다는 c.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형사의 말'일 뿐이라고 항변해보지만, 신문에 기사가 나고 본정서 주목 중이었는데 이번에 또 그런 사실이 발각되었다고 사법게에서 좋아서들 한다는 말을 듣는다. 피해자의 성명까지 분명하다는 것. 이 사건의 전말을 전하면서 'c'는 '그런 일이야 례상사'라고 말하지만, '나에게는 새삼스럽게 놀라운 일 같고, 새 사실을 발각하여 조화서들 한다는 사법계 순사들의 심리를 이해하기 어렵다.'
이 작품의 결말은 '그 후에' 이경옥 사건은 어떻게 되었는지 잊었지만, "요사이에도 길거리에서 죽은깨잇는 트레머리-유록치마 입은 녀학생! 남자를 보면 고개를 금시로 다소곳하고 지나치는 신녀자를 보면 나는 얼빠진 사람처럼 한참 바라보고 섯는 버릇이 생기엇다."라고 쓰고 있다.
여기까지 본 소설의 내용에서 주목해볼 것은 신문기자인 '나'의 사실에 대해 취하는 태도에 대한 것이다. 신문(보도)기사가 다루는 사실의 차원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소설적 주제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작중인물이면서 주인공인 '나'는 신문기자라는 신분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1920년대 신문학 운동을 전개한 대부분의 작가들이 신문사 체험을 가졌다는 맥락과 함께, 염상섭의 경우 동명-시대일보에서 신문 기자 생활을 하면서 작품활동을 했다. 이 작품에서도 검사국에 불려온 기자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소설자료'를 구하고 있는 작가들이다. 기자생활을 하면서 작품활동을 하는 이른바 '기자-소설가'들이라 하겠다. 이렇게 볼 때, <검사국대합실>의 주인공 '나(x)'는 기자와 소설가의 닮음과 다름, 혹은 그 미분화의 특징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문(기자): 민중의 지도, 사회의 목탁. 기자도 사람인 바, 사실을 다 알 수는 없는 것. 직접 취재하지 않고 경찰의 말만 듣고 기사 쓰면 안된다. - 직접 취재를 통한 정확한 보도문 쓰기
더구나 그 녀자에게 마음을 두엇다가 뜻을 일우지 못하고 제분에 못닉여서 그 녀자에게 욕을 보이랴고 긔자를 속여 그러한 보도를 하게 하얏는지 누가 알 일이냐? 신문이 아모리 권의가 잇다 하드라도 허여간 젊은 계집의 창창한 압길을 막아 주는 것은―더구나 활자의 세력이라면 팟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고지 들을만한 이지음의 민중을 상대로 하야 그러한 사실이 잇고 업고간에 신문에 한번 나기만 하면 그 시간이 벌서 그 녀자에게 대하야는 운명의 지침(指針)을 밧구어 꼬저주는 날이다. 아모리 신문의 권위, 긔자의 신위가 소중하다드라도 일개인의 운명을 좌우하랴는 것은 무엇보다도 큰 죄악이다 ― 이러한 지론을 가진 나로서는 이러한 문뎨를 당할 때마다 량심상 가책을 늣기지 안흘 수 없다.
그런데 위의 인용 대목에서 말하는 '양심상 가책'의 문제는 현실을 대하는 신문기자로서의 태도인 동시에 작가로서의 태도에 대한 내용으로 읽힌다. 사건 사고를 '예상사'로 받아들이고 경찰의 말을 받아 쓰는 기자에 대해 C기자의 경우에 '나의 양심'을 맞세워 비판하고 있다. 이 내용이 기자의 보도 태도에 대한 것이라면, '예상사'를 예상사로 대하지 않는, 즉 '그 예상사는 나에게는 새삼스럽게 놀라운 일'로 대하는 태도, 이대목은 현실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예상사를 새삼스럽게 놀라운 일로 바라보기'. 이것은 사실을 공정하게 대해야 하는 기자의 태도와 함께 '사법계 순사'에 대한 비판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새 사실을 발각하여 조화서들 한다는 사법계순사의 심리'를 비판하고 있있는 서술이 그것이다. 사실을 다루어야 하는 기자, 순사의 태도에 대한 비판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작중인물 '나의 기자로서의 양심'인 바, 다같이 현실(사실)을 다루지만 소설가(문인)이기 때문에 다른 지점이 있다는 것. 그것은 '예상사'를 예상사로 보지 않는 것. '이영옥 사건'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는 그래서 명확하지 않다. "요사이에도 길거리에서 죽은깨잇는 트레머리-유록치마 입은 녀학생! 남자를 보면 고개를 금시로 다소곳하고 지나치는 신녀자를 보면 나는 얼빠진 사람처럼 한참 바라보고 섯는 버릇이 생기엇다."라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서, '나'는 예상사사를 예상사로 보지 않으려는, 소설가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다. 이경옥이라는 여자의 외모와 차림새만을 보았을 뿐인 가자 '나'는 아직 그 여자가 벌인 사건의 진실에는 가닿지 못하고 있다. 그 진실에 가닿으려는 시도로 시작된 작가로서의 소설쓰기가 바로 이 작품인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작가로서의 태도, 즉 인간의 삶에서 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인간학적 탐구의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러한 작가로서의 질문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기자(의 기사쓰기)라는 체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기자와 작가의 닮음과 다름을 이렇게 절묘하게 다루고 있는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1925년 전후의 염상섭 작품의 변화 지점을 이 작품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기자로서의 현실인식이 그의 작품활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른 것이다. 작품으로서 증명되는 동시에 작품의 미학적 차원으로까지 그러한 의식을 이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언급해야할 것은 이 작품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이경옥 사건'이 실제 신문에 보도되었던 사건 기사라는 점이다.
<사법계에 미인-여학생 같으나 실상은 매음녀이다>(동아일보, 1924.06.28), <결혼하자고 돈만 빼앗은 여자>(조선일보, 1924.06.28), <매춘부가 일인을 사기 취재-처녀라고 속이고 결혼하자고 속여>(시대일보, 1924.06.28), <매춘부를 여학생으로 변장시키고 남채를 받아먹어>(매일신보, 1924.06.28) 등으로 보도된 바 있는 사건. 이른바 '김도용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과 작중에 소개된 '이경옥 사건'의 기본 골격은 같다. '이경옥 사건'에서 첨가 혹은 변형된 것은 그 밀매음의 피해자가 일본인이 아니라 시골 출신의 한 청년이라는 것, 그 밀매음집단의 사기 수단이 결혼자금 갈취가 아니라 도박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 그 오라비되는 사람이 신문사를 고소했다는 것 등이다. 실제 사건 기사를 참고하여 작품 내적 변형을 거쳐 다루고 있지만, 이 사건을 기사화하는 그 방식이 문제일 수 있다. 그것은 동아일보의 기사 제목이 말해주듯이 그 매음의 주인공이 '(변장한) 여학생'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실제 신문기사의 프레이밍과 '리경옥 사건'을 바라보는 작중인물의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면의 신문기사의 자격. 어떤 재료가 사회면의 기사가 될 수 있겠는가?의 문제를 고려할 때, 그것은 소설 소재와 거리가 멀지 않다. (잡사의 특징-이론소개-더 상세한 논의 생략) 그 당시 매음 사건과 당국의 단속과 관련된 신문보도는 비일비재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밀매음 사건과의 차이가 이 사건의 본질, 염상섭은 그것을 이 사건을 통해 '신여성 특히 여학생의 행태'에 대한 비판의 시선을 포착했을 터. 하지만 다른 작품에서 다루고 있듯이 여학생의 허영심이나 위선을 다루는데까지 나아가지 않고 그 소재적 차원에서 차용하였을 뿐이다. 다시말해 인간탐구의 차원에까지는 나아가지 않고 있다.
소설가의 '신문기사 읽기'의 방법으로 창작된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기까지 한 작품이다.
현진건은 조선문단 합평회(1925.08)에서 <검사국대합실>을, "작의 재료는 내가 아는데 그 사실을 그대로 썼네그려."라고 하면서 '통일된 단편'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이 시기까지 거의 같은 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했던 염상섭과 현진건이다. 현진건 역시 실제 신문 기사문을 다른 작품이 있다. 이에 소설가, 혹은 기자-작가 염상섭이 신문 기사를 다루는 방법과 현진건이 신문 기사를 다루는 방법을 비교해보는 일도 흥미로운 작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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