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 선생님의 <염상섭 연구>에서 염상섭의 '정치적 감각'에 대한 설명들을 발췌해본다.
염상섭의 정치적 감각은 민감한 것이었다. 이런 지적에는 설명이 조금 필요하다. 염상섭을 두고 정치적이라든가 정치적 감각이 날카롭다고 할 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인치고 그렇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청치적 관심의 첫번째 드러남은 1919년 3월 19일의 대판 노동자대표의 직함으로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그 때문에 3개월간 옥살이를 한 사건에서다. 동격유학생들이 1919년 2월 8일에 행한 일을 40일이나 뒤에야 알아차리고 행동한 염상섭의 정치적 감각은 둔감한도 심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한갓 문학청년 지망생인 그가 단독으로 독립선언문은 만들어 운동권을 만들고자 했음과, 옥중에서 대판 조일신문의 서촌 주필에게 도도한 공개장을 보냈든가, 판사를 상대로 이론을 따진 행위들은 문학청년으로는 특출한 정치적 감각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신문기자 노릇을로 아르바이트를 했고, 인쇄소 직공으로 노동운동도 했던 터이다. 그가 진학문의 눈에 들어 동아일보 창간 정경부 기자로 피임된 것은 이러한 그의 전력 때문이었다. 귀국하여 기자 노릇을 할 때에도, 일변으로는 [폐허]지를 만들고 그 그룹의 리더 노릇을 하는 한편, 유종열의 글을 소개하고, 노동문제에 관한 논설을 씀으로써 정치와 경제에 아울러 관여하는 곡예를 벌였다. 그의 은인 진학문이 동아일보를 떠나자 그 역시 홀연히 신문사를 떠난 것 역시 정치적 감각이거나 정치적 몸짓이었다.(252-253면)
"염상섭이 '창조','폐허'이후의 문단, 즉 '백조'가 형성되고 있던 그 공백기에 문단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백조파의 두목격인 박종화에게 엽서를 보내 '문인회'를 만들려고 하니 참석해달라고 한다. 그런데 이 당시 염상섭이 생각한 문인회이 성격은, "[동명]의 상사인 육당, 진학문을 이끌어 넣은 것은 이해된다 치더라도 동아일보의 고하와 설산까지 포섭한 한 것은 무리한 것이었다. 그 당시 신문기자란, 어느 부서에 종사하는 단순한 직업인이기보다는 지사적인 기질을 덤으로 가져 전위적인 그룹이라는 사명감에 불타고 있었다. 게다가 신문기자는 곧 문사라는 의미를 가졌던 시대였다. 즉, 문사와 기자가 구별되지 않았던 과도기였다. 염상섭이 이러한 과도기를 벗어나지 못한 증거가 바로 그가 구상한 조선문인회이다
우리 근대문학의 앞잡이가 이인직, 육당, 춘원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이들이 한결같이 신문기자 또는 적어도 신분-잡지에 종사한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다. 우리 신문학은 신문-잡지의 매체개발과 동시에 나타난 것인만큼 그것은 물과 물고기의 관계에 비유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의 체계에 틈이 생겨 새로운 인식체계가 생기기 시작하여 무시할 수 없는 세력권을 형성한 것"(254) 이 새로운 인식이 체계는 '창조', '장미촌'(1921), '백조'(1921-23), ''금성'(1924)로 이어져 확립된 '동인지 문인'의 의식체계라 할 수 있다. "특히 [백조]는 기자-문인의 의식체계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신문사와는 관련이 없었고, 염상섭만이 애당초 동아일보 정경부 기자였다. 일시적으로 오산학교 교원노릇을 했으나 다시 [동명]과 [시대일보]의 사회부장을 할 만큼 그는 작가이자 신문기자였다. 이 점에서 보면 염상섭은 김동인과 아주 다른 자리에 섰고, 이광수와는 매우 닮은 자리에 섰음이 판명된다. 김동인은 오직 문사였고 그 길만 걸었으며" 이광수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조선일보 부사장직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그는 동우회(흥사단) 두목이었다, 문학을 한갓 여기라고 그가 기회 있을 적마다 공언한 것은 이로 보면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문사와 신문기자, 그리고 문사와 민족지도자적 지사의 미분화 상태를 이광수는 평생을 통해 온몸으로 주장하고 실천한 셈이다."(255)
염상섭의 경우: 자신의 전 생을 기자 노릇과 작가 노릇의 양립으로 가늠하여 회고하고 있다. "작가가 되려거든 기자생활을 집어치우든지, 기자생활을 하려거든 작가는 아예 단념하여 버려야 하겠거늘 붓 한 자루로 되는 일이라 해서 그런지 '쌍수집병'으로 두 갈래 물결에 쓸려내려왔던 것이 나의 과거의 문필생활이었다." 이광수에게 신문사와 동우회 운동은 사상사적 과제(이데올로기 차원)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염상섭에게 그것은 '직업윤리로서 기자의식'에 해당하는 것. 이것은 정치이념이나 민족주의 같은 이데올로기와는 성격이 완전 다른 것으로, 서울 사람의 가치중립적인 생활의식이며 중인의식이다. "염상섭의 기자 생활은 정치적 감각을 가진 것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직업의식으로서의 가치중립적인 것이었다. 그러기에,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기자 노릇을 했고, 일본 관동군이 세운 만주국의 신문 [만선일보]의 편집국장 노릇도 아무런 회의 없이 덥석덥석 할 수가 있었다. 관동군이든 총독부든, 신문만들기라는 직업의식에는 변함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조선문인회를 만들고자 했던 1923년 문렵의 염상섭은 아직도 이러한 직업의식 또는 직업윤리를 분명히 깨닫고 행동한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이 단계의 그는 적지않게 이데올로기적인 직업의식에 얽매여 있었다. 그러기에 조선문인회를 만들고자 하였다.(256-257면)
조선문인회를 바라보는 '백조파', 이들은 "신문기자-문사의 이중성격과는 아주 거리가 먼 중산틍 그리고 중인계층의식을 함뿍 가진 문사들이기도 하였던 만큼 ,염상섭의 저러한 정치감각은 박종화의 표현대로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문인회를 이들은 도저히 용압할 수가 없었다. 문사와 기자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이 백조파에 의해 비로소 뚜렷해지기 시작한 것이다."(257면)
[뢰내쌍쓰](1923.4), [폐허이후](1924.02): 기자와 문사, 사상가와 문사, 지사와 문사의 미분화상태. 그러나 문단적 상황은 벌써 그 둘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태. '백조파'에 의해 문학적 감각이 정치적 감각에 쐐기를 박기 시작한 것. '창조파'가 평양에서 [창조]지의 연장으로 [영대](1924.8-1925.1) 간행. 백조파의 새롱누 감각/염상섭의 정치적 감각/김동인의 평양 중심권의 문학적 감각. [개벽]의 강력한 사상운동, [백조] 3호 이후 유미주의 갈래와 계급주의적 갈래 분화. 신경향파의 근거지였던 [개벽]지 문예란이 그 역할. 이는 문사와 지사의 미분화 상태를 만들어 놓은 정치적 감ㄱ가으로서의 프로문학의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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