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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 희곡 <농촌 스케취> 리뷰

딜쿠샤 2012. 5. 15. 17:38

채만식, 희곡 農村스케취(二幕四景), 별건곤 제31,19300801

 

1. 전라도 한 농촌을 배경으로 지주-중간소작인-농민의 관계를 바탕으로 농민의 이중 착취 구조에 대한 문제제기를 농민연합회의장면을 통해 무대화하고 있는 작품. ‘농민연합회의 장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지주와 관련된 이른바 지배계층의 행태 풍자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지주를 비롯해 교원, 면서기, 기독교인 등의 계층은 농민계층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로지 자신의 이해득실에만 관심이 있다. 가뭄-흉년의 문제와 고지, 임금의 문제의 관계를 자신의 이득 문제로 인식.

 

2. ‘농민연합회 총회 장면

- 표준 임금 제정 문제 토의

- ‘한희열’: 고지, 품삯, 색영 인상안

- 모자 쓴 회원 갓 쓴 회원 대립

- 한희열: 농민연합회 조직 비판: 지주-소작인-농민노동자, 이해관계가 다른 두 계급, 즉 얼치기 농민 소작인과 정말 농민인 농업 노동자를 한 조합에 둔 것은 잘못. “우리 농민 연합회라 하면 농민이라는 무산계급 투쟁 단체여야 한다.

* 이러한 한희열의 주장은 회의 석상에서 연설의 형태로 언술되는 바, 사이사이 경부의 -라는 간섭이 있어 현장감을 더 높이는 효과가 있다. 결국 경부에 의해 중지된다.

* 한희열은 그 결과 주재소로 잡혀가고, 청년지주과 그 주변인물들의 대화 속에, “사회주의자의 말로사회개조를 할려말루 저의 가정부터 개조를 해서 저의 어머니 치마나 하나 해주지”, 사회주의자의 속을 알고 보니깐 그저 도둑놈의 속이라는 등 비판을 가하고 있다.

 

3. 이 작품의 흥미로운 점은 마지막 장면에서 강 지주에 대항하는 판돌네의 등장이다. 판돌이는 강 지주의 집에서 2대째 종살이를 하고 있는데, 강 지주는 판돌네를 당목 적삼에다 남색 끗동을 달어 입고 됫박가티 분이나 바르고 다니는 요물이라고 하면서 동네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주장. 강 지주를 비롯한 지배계급은 김선생의 소실(아내)와 싸운 판돌네를 비판하는 데 상하가 유별이라는 전근대적인 사고에 잡혀있다. 결국 강 지주는 판돌이에게 아내를 쫓아내든지 세음을 계산하고 함께 나가라고 한다. 판돌이는 2대째나 종살이한 의리에 기대어 선심을 호소하나, 판돌네는 그런 판돌이를 비판하고 강지주에게 내 남편이 당신네 종놈이면 나도 종년입데까?”하고 싸운다. 판돌이에게 나가자고 하면서 가지 않으면 나 혼자 가겠다며 나간다. 결국 판돌이는 나리님아내의 양자에 끼어 땅에 주저 앉아 어린애 같이 엉엉 운다.”

* 이 마지막 장면의 판돌네는 앞선 장면의 농민연합회 총회에서의 한희열과 대비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한희열은 사회주의자로 결국 연설로 인해 감옥행이 되고 이어 등장한 판돌네의 저항은 보다 경험적이고 직접적이다. 하지만 판돌네의 (교원 부인과의) 싸움의 원인이나 그러한 저항이 가능할 수 있는 인물 형상화는 뒷받침되지 못한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희열의 바른 말은 경관에 의해, 판돌네의 옳은 말은 지주에 의해 중지당하는 현실을 대비하여 무대화하고 있다.

 

4. 판돌네의 계급의식은 지배계급에 대한 무정형의 저항 심리로만 머물러 있지만, 이러한 여성의 계급의식의 획득은 ?인형의 집을 나와서?노라가 마지막 부분에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의 자각하는 데까지 이어지는 사항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채만식의 여성주의적 시각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계급적 각성의 대상으로 여성을 중심에 둔 것의 의미는 다르게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작품의 경우도 판돌이판돌이네의 상황이 아주 대비적이다. 판돌이의 경우 신분제(상하 유별)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여성 판돌네는 신분제에 대한 비판이 아주 적극적이다. 남편이 종이라고 여편네도 종이냐는 인식으로 저항하고 있다. 아무튼 채만식의 계급의식과 여성의 관련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 듯하다.

 

5. 지배계급과 신문의 결합: 신문의 기능

오후 세시쯤. 막이 열니며 주인 과 보통학교 교원 은 평상 압헤 마주안저 바독을 두고 크리스챤 은 평상에 누어 신문을 읽고 잇고 면서기 右手전면의 문턱을 베이고 누어잇다.

(신문을 한잠 보고 잇다가 獨白)그래 이 중국 놈들은 밤낫 저이끼리 싸우기만 허다가 말텐가?

(덕 일어나 안즈며)흥 하나님 자제라 걱정이 널니 중국까지 밋치시는 모양이로구나? 그러치만 이 넉시 나간 저식아 방금 비가 안이 와서 모를 못 심을 지경인 줄을 알구 그러니? 몰으구 그러니? 너부터도 모을 못 심어서 쩔쩔매고 잇지?

(신문을 노코 일어나 안즈며)그러니 엇젓란 말이야 이 저석아

그러니까 남의 걱정은 두엇다가 풍년이나 들거든 헐 요량허고 우리 걱정을 좀 허란 말이야.

= 이 대목을 통해 기독교인에 대한 비판. 그런데 여기서 기독교인에 대한 비판을 매개하는 것이 신문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인 은 신문을 보다가 중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면서기 는 그것이 남의 걱정이라면서 가뭄 상태인 우리 걱정이나 하라고 비판한다. 기독교인의 현실인식에 대한 비판으로서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신문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신문보도의 내용은 우리의 현실(걱정)’을 다루기보다 남의 문제를 더 중요하게 다루고 있음을 이 대목을 통해 알 수 있다. 물론 필요한 대목을 선택적으로 독서하는 부분을 고려해야겠지만, 언론계에 대해 우리 걱정을 다루지 않는 현실을, 작가의 현실인식 태도로 비판하고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 비판의 주체가 면서기로 설정되어 비판의 정당성보다 풍자적 상황을 연출하는 효과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6. 일반 대중을 위한 설명을 위해 주석 사용:

고지라는 것은 中間作人이 농업 노동자에게 임금을 農期 이전에 선불하는 것

() 여닮이라는 것은 처음 모를 내이는 날 하로 김 매이는 것. 멧칠...이러케 처서 녀름동안 여드래를 일해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