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공부방

염상섭 <미해결>의 명장면

딜쿠샤 2013. 3. 25. 21:06

<미해결>을 읽다가 숨이 턱 막히는 장면을 만났다. 염상섭의 묘사치고 만만한 장면은 없다. 하지만 <미해결>의 이 장면은 숨막히는 분위기 그 자체를 우주적 관점에서 묘사해내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하고 그 사람의 아이까지 어쩌지 못하고 억지 결혼을 한 여자(정순)가 있다. 말할 수 없는 뱃속의 아이라는 비밀은 교회 장로인 시댁과 교권을 둘러싼 권력다툼에 희생이 되어 결국 자살에 이른다. 이 불순한 여자를 둘러싸고 사랑방에서 교회당에서 엉뚱하게 부여받은 발언권을 가지고 나선 남성들의 '토론'이 진행된다. 합리적인 토론을 가장했지만 주먹다짐까지 하며 이 여자의 비밀을 '조사'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여자의 목을 조여오는 상황에서 여자는 스스로 목을 맨다. 비밀을 캐겠다고 찾아온 남자들이 그 여자의 방문을 열었을 때, 해산한 뒤의 아이가 주검으로 놓여 있고 목매단 여자의 시신이 천정에 매달려 있다. 방문을 열어 젖힌 뒤의 분위기가 아래와 같이 묘사되어 있다.

 

<무엇인지를 직각한 상진이는 단걸음에 뛰어내려와서 아내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반쪽이 한편으로 치우쳐 열린 방문 앞에 섰다. 거기에는 맞은 벽 들창에 흔들흔들 늘어붙은 소복한 여자의 뒷모양이 있었다. 상진이는 멈칫하다가 방으로 한 발을 들여놓으면서, 방 한가운데에 뉘어놓은 아이의 포대기를 획 끌어젖혔다. 누런 조고만 무명 요 위에는 사지를 바짝 오므리고 눈이 옴폭 파인 파란 얼굴이 조막만큼 놓여 있었다. 상진이는 얼른 처네를 뒤집어 쓰고 돌아섰다. 지금 본 어린아이의 얼굴같이 된 자기 아내는 모친에게 안겨서, 마루 앞에서 누이가 먹여주는 숭늉을 마시고 있다. 그런 중에도 휘휘 둘러보며 동생을 찾았으나 눈에 띄지는 않는다. 상진이는 잠자코 휙 하며 사랑으로 나는 듯이 나갔다. 모두가 입을 봉하고 손발만 움직인다. 우주에 가득한 소리는 오직 발자취 소리뿐인 것 같다. 네 여자는 모두 눈을 내리깔고 서서 덜덜 떨 뿐이다.

 사랑으로 달음질하던 상진이는 부친과 동생을 맞아서 앞장을 서고, 죽 뒤따라 남자들이 들어온다. 모두 발자국 소리뿐이다. 위원 세 사람도 물로 뒤따라섰다. 머슴은 어디 가 있었던지 일곱째로 들어온다. 모든 사람의 눈과 팔다리는 공중제비로 뛰나, 두 입술은 찰떡 같이 붙었다.

 일곱 남자의 머리는 한쪽으로 열린 방문 앞에, 상규를 맨 나중으로 하고 한데 모여붙었다. 끄떡이 없다. 열네 눈이 쏘는 앞에 축 늘어진 흰 그림자도 '영원' 그것같이 끄떡이 없다. 방바닥에 놓인 검은 뭉치도 개벽 이후에 사람의 발길이 닿아보지 못한 어떤 깊은 준령(준령) 틈에 놓인 대로 놓여 있는 조그만 돌멩이같이 끄떡이 없다. 염병에 걸린 환자가 사람의 눈을 기우면서 다만 한 모금 물을 마시려고 냇가로 허위단심 기어나가서, 흐려진 물에 입을 대고 한 모금 물자 곤두박이를 쳐서 풍덩 하는 소리가 한 찰나 동안 천지의 적막을 깨뜨리며 작고 큰 파문이 동글동글 번져나가다가, 제 물결에 쓸려서 쓰러진 뒤에는 오직 큰 침묵 가운데 물만은 제대로 흐르고 또 흘러간다. 시치미 떼고 흐른다. 다만 그뿐이다!>

 

 교회당에서 주먹다짐으로까지 이어졌던 '언쟁의 분위기'는 이 장면 앞에서 턱 막힌다. 염상섭은 이 여자의 죽음 앞에 남자들 모두를 침묵시켰다. 스스로 목을 맨 여자가 그대로 방안에 매달려 있다. 이 앞에 '우주에 가득한 소리는 오직 발자취 소리뿐'이다. 마지막 '염병에 걸린 자의 물마시기' 비유가 압권이다. '침묵의 공간'과 '영원의 시간'으로 구획된 죽음의 장면 속에, 물만 시치미 떼고 흐르듯, 사람들의 비밀에 대한 호기심과 자기 이익을 둘러싼 논쟁과 언쟁 따위는 고개를 내밀 수 없다. 염상섭이 한 여자의 죽음에 공명하는 자세를 알 수 있다. 인간사 '큰 파문'도 거대한 '침묵' 가운데 옴싹달싹 못한다. 죽음은 그런 것이다. 조금은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스며 나오는 것은 목 매달린 시신 때문이 아니라 그 순간 앞에 고여 있는 '침묵' 때문에 가능한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