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복규, <서울은 어떻게 계획되었는가>, 살림, 2005.
시가지계획 도로망이 일괄 고시된 것은 1936년 8월.
도로망 부설계획에 이어 구획정리사업이 입안되었다. 경성 시가지계획 구획정리사업의 전체적인 계획도 1936년 말경에 완성되었지만 총독부는 그 전체 계획은 비공개로 하고 해당 사업지구 별로 계획을 발표하기로 결정했다. 구획정리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특히 공업지역 예정지에서 토지 투기, 지가 폭등과 같은 현상이 빈발했기 때문이다.
당시 시가지계획과 관련된 토지 투기는 문학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일례로 김남천의 <사랑의 수족관>에는 경성부의 행정구역의 확장을 '돈버는 계책'과 연결시키는 신일성이라는 토지 브로커가 등장하고 있다. (38면)
<철거와 저항: 도시계획과 빈미주거 박탈>
유치진 희곡 <토막>(1931)
토막민들은 식민당국으로부터 "구체적 시혜도 받지 못했지만 반대로 적극적인 취체도 당하지 않는" 이중적 의미에서 권력의 무관심과 무통제의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59면)
모든 철거는 '적법과 불법'의 구도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빈민주거대책의 가능성과 한계>
경성부의 새로운 토막민 대책은 도시빈민층의 주거지를 도시 내부에 분산적으로 마련한다는 점에서 일면 드글에 대한 '포섭'이었으며, 또한 토막민 주거지를 세민지구라는 이름으로 일정하게 경계지어 일반주거지와 분리시키려했다는 점에서 그들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즉, 토막민을 국가의 통제하에 두고 차별적으로 관리하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는 사실상 '대책 아닌 대책'이었던 기본의 추방-외곽 집단 수용 대책에 비해 한 단계 전진한 것으로 당시 언론계에서는 "부외집결주의에서 현지중심주의로"(조선일보, 1938.10.13) 혹은 "구축에서 보호로"(동아일보, 1938.10.16) 전환한 것이라고 평가했다.(68-69면)
염복규, 日帝下 京城도시계획의 구상과 시행 = (The) conception and implementation of the Kyungseong urban plan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ist rule / 염복규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08.
이경아, 日帝强占期 文化住宅 槪念의 受容과 展開 = (The)Adoption and evolution of the concept of "Culture Hous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n Korea / 李炅娥 서울大學校 大學院 박사학위논문, 2006.08.
5.2. 문화주택지 개발의 성격
5.2.1. 성벽 주변의 미개발지의 주택지로의 전환
성벽이 붕괴된 이후 성저십리의 개념은 사라졌고, 문화주택지 개발이 시행되는 1920년대를 전후하여 도시 주변은 '교외'라는 명칭으로 지칭되기 시작했다. '교외'라는 개념은 조선시대부터 쓰이던 개념이었지만, 1920년대 전후 나타난 이 개념은 다분히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 <비위생적이고 혼잡한 도시를 벗어나 맑은 공기와 물을 얻을 수 있는 곳, 저렴한 가격에 토지를 구입하고 서양식 외관을 가진 멋진 집을 지을 수 있는 곳, 그 곳에는 대개 중류층이 거주하고 그들의 직장이 있는 도심으로는 싸고 빠른 사철로 연결되는 곳.>(145-146)
경성의 문화주택지 개발은 1925년 신당리에 생긴 경성문화촌과 정엽정일정목에 생긴 미도리카오카.
동부, 남부, 서부로 나누어 진행
* 동부=경성의 내/외부; 신당리 부근의 경성부외 주택지와 낙산 자락을 중심으로 한 경성부내 주택지
경성부외 주택지(1930년대): 무학정 주택지, 사쿠라가오카, 동소화원 주택지, 상완십리의 청계대주책지.
경성부내 주택지: 낙산 자락의 주택지들로는 숭일동, 숭사동, 혜화동, 약수대, 고동원 등 주택지, 제국대학-고공, 고상, 의전공업학교 등이 모여있는 지역의 주택지.
* 남부지역 주택지: 남산의 북사면에 위치한 남산 일대 주택지와 남산의 남사면에 용산 일대 주택지
남산 지역 주택지는 예전부터 일본인들이 모여 살아 남촌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지역으로 기존 일본인 거주지역과 동쪽 성벽 사이에 위치하며 현재 장충동에 속하는 동사헌정의 소화원 주탹지와 구감천정 주택지, 서사헌정의 남산장전고대 등.
용산 지역의 주택지는 경부철도선로를 중심으로, 서쪽에는 미도리가오카, 청엽정 주택지, 동쪽에는 츠루가오카,신락원, 신정대, 삼판통, 삼판통주택, 히노데가오카, 화락원 등의 주택지들이 있었다. 이중 츠루가오카 주택지는 1925, 1927, 1928년 3차례에 걸쳐 개발된 경성의 대표적인 문화주택지 중 하나.
서부지역: 금화장 주택지(1928, 1930년대 2차례 개발), 쌍룡원, 천연장, 연희장, 쌍룡대 등의 주택지. 1937년 북아현리의 연희장 주택지는 유한파 한국인 건축가들이 본격적으로 문화주택 건설업에 참여하지 시작한 것.
* 입지: 남산, 낙산, 금화산, 대현산 등의 경성 주변부의 산자잙과 도심부로의 접근성이 높은 곳에 위치
- 주택지 선정 기준: <조선과 건축>(4집5호)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에 문화주책의 계획> 1) 상업의 번잡, 공업지의 불위생 등의 영향을 받지 않는 곳, 2) 남향의 토지로, 서북에는 산을 등지고 수목이 많아 조망이 좋은 토지, 3) 시내에는 가깝고 편리한 토지.
- 2의 조건 : 남산의 북사면: 산들의 남사면, 서울 성벽의 남쪽, 남산의 미개발지들은 수목이 많고 조망이 좋을 뿐 아니라 일본인들의 밀집 거주지역인 남촌과 가까워서 더욱 각광을 받음.
- 3의 조건: 편리한 교통의 조건. 전차가 개발되어 있지 않는 도시 외곽은 불편하므로, 되도록이면 도심 가까이에 위치한 미개발지역 선호. 성벽 근처는 경사가 있는 산지로서 개발되기 힘든 지형적 조건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러한 조건에 주목한 주택지 개발지들은 이곳을 새로운 주택지 개발로 개발하게 됨. 여기에 도로의 개발이 중요한 사항인데, 대체할 다른 교통수단이 없었으므로 자동차를 가진 이들만을 위한 주택지 개발이 됨.(150-151면)
* 대경성 만들기, 화려한 이상도시, 문화도시 만들기 사업은 당시 조선의 열악한 주택 및 도시 상황과는 무관하게 진행된 것이었으며, 오히려 토막민들의 희생을 전제로 하여 갈등을 빚었다.
1930년대 초반부터 계속 추구되었던 남산의 국유림 불하건과 남산주회도로 개통건이 진척되면서, 이에따라 인근에 있던 토막민의 철거와 철거민들의 이동은 반복되었다.(187-8)
시외 신당리에 잇는 동양척식주식회사 소유 토지에 오래 전부터 토막을 짓고 살아도던 중 죠지움 동척에서 철거를 -- 말을 듣지 않을 때에는 강제로 집을 헐겠다고 말을 하자... 최후까지 동척에 대항해서 철거요구를 일축하자는 것으로 여러 가지 방책을 토의하여 그대로 나가면 진전이 험악하게 될 염려가 있었는데, 이것을 탐지한 신당리 주재소원이 중지시키는 동시에 ㅡ극시 본서로 급고하여 동서고붕게 사법계원이 급파해가지고 그중 주동자로 인정되는 장봉산 외에 4명을 인치하야 유치시켰는바....<신당리 동척토지 토막철거로 절규>, <<동아일보>>, 1935.04.14.
토막민의 철거와 토막민들의 이동 특성: 도시 외부에 이주되지만 다시 도심부 근처로 이동, 삶의 터전으로서 도시.
<세궁민은 쫓겨나고 문화주택만 증설, 남산주회도로 부근에>, <<조선일보>>, 1938.11.29.
洪夕洲, <옛 北邙山의 봄-貧民窟의 스냅->, <<별건곤>>제50호, 1932.04.
기획 <春色三千里 >에 曉山, 崔泳柱, 洪夕洲, 壽春山人, 黎曉 등이 필자로 참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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