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생각하기

나희덕의 <고여있는, 그러나 흔들리는-우포늪에서>

딜쿠샤 2006. 5. 24. 06:28
 

고여 있는, 그러나 흔들리는

             - 우포에서

                                                  나희덕


후두둑 빗방울이 늪을 지나면

풀들이 화들짝 깨어나 새끼를 치기 시작한다

녹처럼 번져가는 풀은

진흙뻘을 기어가는 푸른 등처럼 보인다


어미 몸을 먹고 나온 우렁이 새끼들도 기어간다

물과 함께 흔들리고 잇는 풀들

그 사이로 빈 우렁이 껍데기들 떠다닌다


비가 아니었다면

늪은 무엇으로 수만 년을 견뎠을까

무엇으로 흔들림의 징표를 내보였을까


기어가는, 그러나 묶여 있는

고여 있는, 그러나 흔들리는


후두둑,

후두둑,

후두후둑,

빗방울이 늪 위에 그려넣는 무늬들


오래 고여 있던 늪도

오늘은 잠시 몸이 들려 어디론가 흘러갈 것 같다



  산도 벌판도 아니고 강도 바다도 아닌 늪. 참 그러고 보니 늪에 대한 나의 인식에는 무언가 선입견이 있었던 것 같다. 외국 영화 탓인지 나는, 늪 하면 온몸을 서서히 집어삼키는 그래서 당장이라도 머리까지 쑥 빨아 드릴 것 같은 끔찍한 곳. 뭐 이런 느낌이 고작이었다. 이 시를 읽으며 나의 이런 기억에 얼마나 웃었는지. 그리고 언제가 TV에서 우리 나라의 늪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때도 있었던 것 같다. 아마 울산에도 세계적인(?) 늪이 있다지. 이렇게 무지해서야...

  시인의 시선은 바다도 강도 아니고 산도 벌판도 아닌 바로 그 늪에 닿아 있다. 애매한 위치 때문인지 우리의 관심에서 얼마간 빗겨 있는 곳이었던 늪. 그러나 태고의 모습을 담고 있다하는 그곳. 그래서 그 늪을 생물의 寶庫라고까지 하지 않던가. 시인이 이 곳을 놓칠 까닭이 있겠는가. 더군다나 나희덕의 시선에.

  이 시는 우포늪이라는 장소에서 발견한 사실적인 생명의 약동을 보여준다. 그 약동은 그러나 시의 전체적인 구도에서 조용함과 어울려 있어 그 생명의 무게가 느껴진다. 이 시의 제목이 그러하듯 우포늪의 생명은 ‘고여 있는, 그러나 흔들리는’ 불균형의 미학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그 애매한 위치 덕분(?)인지 다행히도 아직 늪은 사람의 발길에 짓밟히지는 않은 곳이다. ‘수만 년을 견뎌’낸 그 깊이만큼 늪은 고요하다. 그러나 늪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숨을 쉬고 있는 생명체라고 하지 않는가. 시인은 늪의 ‘흔들림’(생명)을 읽고 있는 것이다. 늪의 호흡과 움직임은 ‘그 흔들림의 징표’는 ‘후두둑 빗방울이 늪을 지나면/ 풀들이 화들짝 깨어나 새끼를 치기 시작’하는 데서, ‘어미 몸을 먹고 나온 우렁이 새끼들도 기어’가는 데서, 그리고 ‘물과 함께 흔들리는 풀들/ 사이로 빈 우렁이 껍데기들 떠다니’는 데서 포착된다. 다시 말해 늪은 ‘풀’과 ‘우렁이’ 등 모든 생명체의 탄생과 죽음까지를 품는 ‘몸’이다. ‘새끼를 치는 풀’, 어미 ‘몸’을 먹고 나온 우렁이 새끼들을 끼우는 ‘몸’이며, ‘빈 우렁이 껍데기’(죽음)도 같이 ‘떠다니는’ ‘품’이다. 이렇게 늪은 그 몸 위에 많은 생명의 生死를 품고 있는 ‘몸’이다. 그러나 늪은 ‘묶여 있는/ 고여 있는’ 운명이지 않는가. 시인은 이러한 운명을 가진 늪이 ‘무엇으로 수만 년을 견뎠을까’라고 묻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비[雨]’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 앞서 본 ‘풀들’과 ‘우렁이’ 등은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때문에 관찰될 수 있었던 것이다. 늪의 표면에 있는 ‘물’과 그것과 함께 ‘흔들리고 있는 풀들’ ‘그 사이로’ 떠다니는 ‘빈 우렁이 껍데기’ 등은 바로 ‘후두둑/ 후두둑’ 떨어진 ‘빗방울이 그려 놓은 무늬들’인 것이다. ‘오래 고여 있던 늪’이 움직이는-숨을 쉬는- 때는 바로 비가 올 때인 것이다.

  따라서 “기어가는, 그러나 묶여 있는/ 고여 있는, 그러나 흔들리는” 늪인 것이다. ‘오래 고여 있던 늪’이 움직이는 때는 역동적이다. 바로 “후두둑,/ 후두둑,/ 후두후둑”의 소리와 그 위에 그려지는 “무늬들”의 모습으로 표현된 청각적 이미지와 시각적 이미지의 결합이 이것이다. 이렇게 역동적인 늪의 모습을 관찰(발견)한 시인은 늪의 일렁거림의 탄력을 온몸으로 느낀 듯, 늪이 “오늘은 잠시 몸이 들려 어디론가 흘러갈 서 같다”라는 절묘한 표현을 하고 있다.

  늪은 그 애매한 위치만큼이나 그 자세도 고요함과 역동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 시인은 늪의 이러한 모습을 절묘하게 표현함으로써 ‘늪’을 움직여 놓은 것이 아닐까.


 나희덕의 시를 읽기 시작한지는 꽤 오래 되었지만 이렇게 구체적인 평을 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의 시에서 읽히는 이러한 생명력과 그것에 꼭 맞는 형식, 그리고 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엄숙한 떨림과 깨달음 등 묘하게 오랫동안 그를 따라가게 한다. 나는 그것이 행복할 따름이다. 한 편 한 편이 일정하게 다 고른, 그래서 단단한 시세계를 보인다는 점이 나에겐 그의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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